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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한때 제3세계 연대 이끈 ‘능동적 행위자’였다” [.txt]

2026.05.15 05:02

미 역사학자, 20세기 후반 북한 정책 재평가
미·소 양강 구도에서 주체적 ‘자기 공간’
테러·세습독재·핵개발로 점차 고립돼
1960년대 북한이 탈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 전선에 제3세계 국가들의 연대를 강조한 선전 포스터들. 너머북스 제공
오는 20일, 북한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수원 에프시(FC)위민과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4강전을 치르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축구팀의 방한이 남북 교류의 물꼬를 틀지는 미지수다. 최근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 기조를 다시 확인했고, 헌법에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조항을 삭제했다. 미국 역사학자 벤자민 영의 `총, 게릴라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는 종잡을 수 없는 북한의 행보를 지난 역사를 통해 설명하는 책이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북한이 “닫혀 있는 국가가 아니라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에서 ‘자기 공간’을 만들었던 지구적 행위자”였다는 점이다.

자기 공간을 만들기 위한 북한의 선택은 제3세계를 곁에 두는 일이었다. 오늘날 제3세계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지만, 20세기 중후반에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와는 다른 대안 체제를 모색하는, 탈식민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단어였다. 지은이에 따르면 북한의 제3세계주의적 감성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만주적 전통”, 즉 만주에서 일본 식민주의자들과 싸웠던 초창기 경험이 북한을 “많은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에 동조하는 확고한 반식민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총, 게릴라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l 벤자민 영 지음, 백원담·옥창준 외 4인 옮김, 너머북스, 1만9000원
1950년대 중반, 김일성의 입지는 불안했다. 소련파와 연안파의 반대에 직면한 탓이다. 항일 유격대 중심의 빨치산파가 결국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1956년 정적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56년부터 1967년 사이,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제3세계의 반식민 저항 운동과 탈식민 세계에 퍼져 있던 다양한 해방 이념”과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북한은 특히 쿠바와 ‘합’이 잘 맞았다. 1960년 8월 문화협력협정을 체결했고, 11월 체 게바라가 중국 방문 직후 평양으로 날아왔다. 쿠바는 냉전 내내 북한을 지지하면서 “북한 국제 네트워크의 핵심” 역할을 해주었다. 1967년 체 게바라가 전사하자 김일성은 그를 “혁명 영웅”으로 추모했고, 서거 1주년에는 `로동신문'에 직접 쓴 논설을 게재할 정도였다.

김일성은 베트남전쟁도 적절히 활용했다. 공군 병력 외에 물자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존재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과,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한다면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 시기 김일성은 “제3세계를 자주적인 반식민주의를 확산시키고 자신의 국제적 명성을 높이기 위한 비옥한 토양”으로 인식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김일성주의는 신문 광고, 영화 상영, 북한 무상 여행 등을 통해 국경을 넘어 확산한다. 당시 제3세계 신문에 게재되는 북한 광고의 양이 너무 많아서 “한국 정부는 해외에 실리는 북한 광고에 일일이 항의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70년대 들어 남한과 북한의 상황이 돌변했다. 남한은 경제발전을 지상 과제로,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조선 우선’ 정책을 추진한다. 북한의 건설사와 노동자들이 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장, 대통령궁, 경기장을 지었다. 북한의 기술자들은 소말리아, 르완다, 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도시 하수처리 체계를 구축했다. 자연스럽게 제3세계 정부들이 주체사상에 다시 주목했다. 제3세계 국가들은 ‘조선 우선’이라는 민족주의적 사상이 가미된 주체사상을 “자립을 강조하는 자신들 고유의 토착 개념과 연결”시켰다. 자립이야말로 탈식민지화를 추구하는 많은 정부에게 “단합의 외침”처럼 들렸던 셈이다.

북한 평양 만수대에 세워진 김일성(왼쪽)-김정일 부자의 동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정일 시대를 맞아 북한의 기조도 조금씩 달라졌다. 김정일은 1980년대 초반 남한의 혼란을 자신이 “한반도의 탁월한 정치가라는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받을 기회”로 여겼다. 가장 큰 사건은 1983년 미얀마(옛 버마)의 당시 수도 양곤에서 자행한 폭탄테러였다. 한국 대통령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북한 지도부의 대외정책 전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반도라는 지리적 경계에 국한되었던 남북한의 군사적 경쟁이 급기야 제3세계로 확장된 것이다.

한편 이 시기 북한의 전략은 이원화되었다. 군사 분야는 김일성이, 예술적 권위는 후계자인 김정일이 지휘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집단체조’를 해외에 수출하는 데 열중했다. 수천명의 학생이 혁명 구호를 카드 섹션으로 연출하고, 숙련된 무용수들이 안무에 맞춰 춤과 곡예를 선보이며 대외 선전을 강화했다. 김정일은 한 담화에서 “혁명적인 사상의식과 다방면의 지식, 풍부한 문화적 소양과 건장한 체력은 공산주의적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 풍모”라고 강조했다.

1980년대 후반, 북한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살아남고자 애썼다. 당시 북한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도운 에티오피아와의 관계 개선에 몰입했다. 1977년 정권을 잡은 멩기스투의 독재적 성향이 “김씨 일가 정권의 독재적 성격”과 맞아떨어졌고, 남다른 개발원조 규모와 농업 기술자 파견 등으로 북한 입지는 높았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원조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척박한 환경은 차치하고서라도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된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86년 이후 제3세계 개발을 위한 재정지원을 줄였다. 그런가 하면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에 맞서기 위해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지만, 해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미지를 개선하지는 못했다. 북한 체제는 이미 서방세계에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한 상태였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그 불명예를 재확인하는 형국이었다.

제3세계는 이제 북한과의 관계에 빗장을 걸고 있다. 핵 도발, 각종 암살 사건과 해킹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인 역사적 행위자”였고, 기본 기조는 여러 행태를 통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게 지은이의 시각이다. 남과 북은 미증유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 `총, 게릴라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가 역사적 참조 자료로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겠다는, 적잖은 기대를 품게 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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