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상무기 수출 빗장 푼 日... 아세안 텃밭서 K방산과 '진검승부' 벌인다 [아세안 속으로]
2026.05.15 04:30
잠수함·호위함 등 주력 분야 정면충돌
일본 자금력 공세에 맞설 전략 시급
“일본의 살상무기 수출, 솔직히 신경 쓰인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에 진출한 한국 방산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아세안 방산 시장은 가성비, 빠른 납기, 풍부한 실전 경험을 앞세운 K방산의 핵심 시장이다. K-9 자주포, KF-21 한국형 전투기, 울산급(BatchⅢ) 호위함 등이 아세안 각국에 수출됐다.
그러나 일본이 60년 만에 ‘살상무기 수출 금지’ 조항을 폐지하면서 K방산업계에 긴장감이 감돈다. 업계 관계자는 13일 “일본이 수출하려는 함정·항공기·잠수함 등은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와 상당 부분 겹친다”며 “중·장기적으로 정면 경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빗장 풀고 아세안 공략 나선 일본
일본은 그동안 구조·수송·경계·감시·기뢰제거 5개 용도의 무기만 수출을 허가했다. 그러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지난달 21일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의 이 조항을 폐기하며 살상무기 수출 빗장을 풀었다.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악화”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군수산업을 키우겠다는 의도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일본의 움직임은 빨랐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장관은 무기수출 해제 보름 만인 이달 3~7일 인도네시아·필리핀을 연달아 방문했다. 아세안 각국은 중국과의 남중국해 갈등, 장비 노후화, 이란 및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안보 불안으로 방위 예산을 대폭 늘리는 추세다.
일본이 아세안·해양 방산에 집중하는 점은 K방산과 겹친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오야시오급 잠수함 수출을 타진하고 있고, 필리핀에는 퇴역 예정인 아부쿠마급 구축함 호위함 이전을 추진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도 직접 등판했다. 그는 8일 베트남을 찾아 레 민 흥 총리와 회동하고 방위·안보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에서 장보고급 잠수함, KF-21 전투기 등을 수입한 K방산의 주요 파트너였는데, 일본 쪽으로도 탐색 범위를 넓힌 것이다. 필리핀 역시 HD현대중공업이 2016년부터 함정 12척을 수주하는 성과를 내고, 한화오션이 잠수함 계약을 노리는 K방산 핵심 시장이다.
항공 분야에서 맞붙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일본은 영국·이탈리아와 손잡고 2035년 배치를 목표로 6세대 차세대 스텔스(GCAP) 전투기를 개발 중이다. 당장 한국의 4.5세대 전투기 KF-21과 경쟁할 무기는 아니지만 일본이 호주·인도·아세안 판매를 염두에 두고 있어 미래 경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일 역량, 지금은 체급 차이가 난다
단기적으로는 한국이 우위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5년 단위로 집계하는 방산시장 수출 점유율에 따르면 한국은 2021~2025년 세계 9위(3.0%)를 차지했다. 일본은 30위까지 발표하는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일본 방산은 그동안 내수 중심으로 운영된 탓에 생산 단가가 높고 대량 생산 경험도 부족하다.
그러나 저력을 얕볼 수 없다. 섬나라인 일본은 해양·미사일·공군 전력이 우수하다. 당장 호주가 지난달 18일 미쓰비시중공업과 70억 달러(약 10조3,380억 원) 규모의 차세대 호위함 ‘모가미급’ 구입 계약을 체결했고, 뉴질랜드도 모가미급 구입을 타진 중이다. 한국에선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 등이 호주 계약에 참여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호주는 일본 호위함의 장거리 작전 능력과 미 해군과의 연동성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엄효식 한국국방안보포럼 방산안보실장은 “호주 호위함 사업권은 우리가 따낼 것이라는 예상이 많아 충격이었다”며 “그동안 아세안 지역 함정·호위함 계약은 한국이 휩쓸었지만 일본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했다. 이어 “해군 부문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고 향후 지상·공중 분야에서도 일본이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했다.
일본의 또 다른 강점은 자금력이다. 일본은 2023년 대외원조의 일환으로 ‘안전보장능력강화지원’(OSA) 기금을 신설해 아세안 각국에 ‘무기 기부’를 시작했다. OSA 기금 예산은 올해 약 181억 엔(1,693억 원)으로 지난해 대비 125%나 늘렸다. 일본이 OSA와 저금리 차관을 연계할 경우 한국의 가격 경쟁력을 일정 부분 상쇄할 가능성이 크다.
지정학적 상황도 일본에 유리하다. 남중국해 문제로 중국과 충돌하고 있는 아세안 각국은 ‘무기 수출’을 통해 일본이 중국 견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상황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미국 역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방위력 강화를 적극 밀어주고 있다. 구매자 입장인 아세안 각국은 K방산 외의 선택지가 생긴 것도 나쁠 것 없다고 여긴다.
"한국 배우자"는 일본, 대응 전략은
일본은 공개적으로 ‘한국 방산을 배우자’고 하고 있다. 일본 닛케이아시아는 “일본은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인 한국과 맞서고 있다”라며 “한국은 신속한 납품과 가격 경쟁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우익 성향 월간지 하나다도 최신호(6월호)에서 “혐한 감정이나 ‘한국은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선입견 때문에 ‘설마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한국제 무기의 수출 확대에는 이유가 있다”라며 K방산의 강점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한·일은 수출 전략도 비슷하다. 한국은 그동안 함정을 구매하려는 국가에 중고·퇴역함정을 먼저 기증하거나 저가에 판매하는 이른바 ‘록인’(Lock-In·선점) 전략을 구사했다. 일본도 OSA 기금을 통해 필리핀에 해안 감시 레이더를 제공하고, 베트남·말레이시아 등에 초계함(순시함), 초계용 드론 등을 기증하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퇴역 함정 공여도 검토하고 있다.
일본뿐만 아니다. 프랑스·인도·튀르키예 등도 아세안 시장을 적극 두드리고 있다. 인도는 현재 인도네시아에 4억5,000만 달러(약 6,700억 원)로 추정되는 브라모스 초음속 순항미사일 수출을 추진 중이다. 프랑스는 베트남에 라팔 전투기 판매를 추진 중이고, 튀르키예는 말레이시아 호위함 사업에서 한국·일본 업체와 경쟁 중이다. 전통의 방산 강국인 미국·러시아가 이란 및 우크라이나전 대응으로 자국 물량 확보에 급급한 사이 ‘중견 방산국’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이다.
종합적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일본의 OSA 기금에 맞선 금융 패키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업계 관계자는 “방산 수출에 국가가 보증을 서는 중국·튀르키예·유럽처럼 우리 수출입은행도 저금리와 대폭적인 대출 보증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정부 간(G2G) 거래 때 계약이 지연되지 않도록 행정 절차를 단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엄 실장은 “아세안 각국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점은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이라며 “어디까지 공장을 건설하고 기술을 제공할 수 있을지 우리 나름대로 기준선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코트라 하노이무역관 측은 "국익과 기술 보호를 고려하면서도 현지 수요에 맞춘 패키지형 방산 수출 전략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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