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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文을 버려야 진실이 보인다

2026.05.15 00:05

[창작가]
‘백범 강산에 눕다’
임순만 작가
임순만 작가가 지난 7일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평생을 문장과 함께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글쓰기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임 작가는 "두려움, 치기, 허영을 다 내다 버리면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웅 기자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했을 때, 임순만 작가는 오전에 보자고 했다. 동향 집이라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빛이 좋다면서. 개화산을 등지고 있는 서울 강서구 아파트에 들어서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실 창가에 마련해 둔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임 작가는 “밝은 빛이 들어오는 시간을 좋아한다”면서 “창밖에 보이는 나무의 초록색이 매일 달라지는 요즘이 하루하루의 변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한동안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매일 달라지는 나무의 초록을 놓치지 않는 그 예민한 시선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임 작가는 지금은 충주시로 편입된 충북 중원군 노은면의 외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이종 사촌들이 살고 있는 충주 시내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도시 아이들에게 많이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하기 전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영어는 ABC 정도만 알고 입학했는데 도시 친구들은 달랐다. 임 작가는 “그 당시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운데 일종의 ‘문장’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문장? 그는 “한글도 모를 어렸을 때 마당에서 뭔가를 쓰곤 했다”면서 “아마도 내 속에서 우러나는 어떤 뭔가를 표현하려는 욕망이 가득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임 작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글을 잘 쓰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교내는 물론 교외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그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조용한 시골 마을의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교 1학년 때 괴테와 도스토옙스키, 카뮈의 작품을 읽으면서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임 작가는 집안에 내려오던 할아버지의 문집도 언급했다. 그는 “세 권짜리 문집은 국한문 혼용도 있고, 한문 문장만으로 기록된 것도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 가끔씩 읽었다”면서 “뵙지 못한 할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소설은 세상 이면의 진실을 말한다

임 작가에게 가장 영향을 준 책은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일리아스’였다. 그는 “기원전 8세기에 쓰인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스케일 속에 흐르는 세부 이야기들의 마력은 지금도 눈이 부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적진인 그리스 진영으로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일리아스’의 마지막 제24권을 길게 설명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는 그리스의 아킬레우스와의 결투에서 전사합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매달아 트로이 성벽 주변을 끌고 다니며 모욕했습니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시신을 찾아와 장례 지내기 위해 노령의 몸임에도 홀로 적진으로 향합니다. 그는 아들을 죽인 원수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노쇠한 그대의 아버지를….’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세상 어느 아버지도 하지 못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의 손에 입을 맞추는 일을 하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이 말에 아킬레우스는 고향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오열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적대 관계를 넘어 인간은 누구나 고통받는 존재라는 보편적인 슬픔 아래 하나가 됩니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를 정중히 대접하고, 헥토르의 시신을 깨끗이 씻겨 돌려주며,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12일간의 휴전을 약속합니다. 복수심에 불타던 영웅 아킬레우스는 노인의 슬픔에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며 인간성을 회복합니다.”

임 작가가 맨 처음 소설을 쓴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죽어가는 병원 집 딸을 지켜보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이었다. 중3 여름방학을 지내고 교지 편집위원에게 보여줬는데 교지에 실렸다고 했다. 그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겠지만 ‘일리아스’를 예로 들었듯이 소설은 다른 장르보다 세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이 길다”면서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왜 하필이면 백범인가

사진=윤웅 기자

글을 쓴다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대학 전공은 문예창작과를 선택했다. 여러 편의 소설을 썼지만 등단은 쉽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글 쓰는 직업’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직업인이어서 원하는 것만 할 수는 없었지만 문학 담당 기자 시절에 쓴 ‘임순만 기자의 문학 이야기’를 비롯해 꾸준히 다양한 책들을 펴냈다. 퇴직 후 다시 소설에 도전했다.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천재 화가 에곤 실레의 이야기를 다룬 첫 장편소설 ‘백 년간의 잠’에 이어 최근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소설로 엮은 ‘백범 강산에 눕다’도 내놨다. 기자로서의 글쓰기가 어떤 도움이 됐을까. 그는 “기자는 여러 사건을 접하기 때문에 객관화하기가 쉽고, 그래서 잘 읽히도록 글을 쓸 수 있다”면서 “글을 쓸 때 자의식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첫 장편 소설은 작정하고 오피스텔을 얻어 1년 만에 원고를 마무리하고 출판까지 했다. ‘백범 강산에 눕다’는 10여년의 구상과 자료 조사 기간이 있었고, 동네 도서관을 오가며 5년에 걸쳐 ‘천천히’ 썼다. 그는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글을 쓰니까 오히려 쉽게 글이 써졌다”고 말했다.

임 작가는 분단 극복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백범의 후반기 삶에 주목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수천 년 역사 가운데서 민족사적으로는 참으로 비통한 세월을 살고 있다.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의 분단만큼 억울하고 분한 시절은 없을 것”이라며 “같은 민족이 80년 넘게 적으로 살아가는 이 비극을 우리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험난한 시대에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던져 민족의 수난을 막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맙고 눈물겹습니다. 그 중심에 백범이 있었습니다. 그는 서러움과 좌절을 자기 몫으로 껴안고, 나라의 독립과 분단 극복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두고두고 놀라워하는 것은 백범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평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좀 더 강조해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잡함 넘어선 간명함의 미학

평생을 문장과 함께 살아온 임 작가도 여전히 글쓰기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 ‘백범 강산에 눕다’를 쓰면서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는 부분, 앞으로 잘 나아가지 않는 부분, 그런 곳에는 쓰는 이를 짓누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창의적인 글쓰기는 시작될 수 없다. 그는 “두려움, 치기, 허영, 그런 것을 다 내다 버리면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 작가가 글을 쓸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문장’, 즉 미문(美文)이다. 그는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어야 하는 대목에서는 정밀한 묘사가 필요하지만 결코 미문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화려한 수식은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방해물이 될 뿐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기자 시절부터 몸에 밴 ‘쉬운 글’은 소설가 임순만에게도 절대적인 원칙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작가로서의 포부를 묻자, 역시 ‘쉬운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재 집필 중인 몇 편의 장편 소설들은 ‘나름의 시간표’ 안에서 차곡차곡 완성돼 가고 있다.

“가능하면 아주 쉽고 간명한 이야기로 만들고 싶습니다. 쉬운 이야기는 잘 읽히지만, 쓰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쉽고 간명한 이야기를 쓰려면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쉽고 간명한 이야기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넘어선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책을 잘 읽지 않고, 대부분의 이야기가 외면받고 있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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