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음식'은 거기서 거기? 건축학도가 그려내는 태국 현지의 맛
2026.01.16 04:31
<23> 호라파 손승희
편집자주
음식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 셰프죠. 신문기자 출신이자 식당 '어라우즈'를 운영하는 장준우 셰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너머에서 묵묵히 요리 철학을 지키고 있는 셰프들을 만납니다. 한국 미식계의 최신 이슈와 셰프들의 특별 레시피를 격주로 연재합니다.우리는 흔히 베트남의 쌀국수, 태국의 팟타이, 인도네시아의 나시고렝을 한데 묶어 '동남아 음식'이라 부르곤 한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쌀을 주식으로 하며 피시소스나 유사한 향신료를 쓴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입장을 바꿔 보자. 누군가 한국의 김치찌개와 일본의 스시, 중국의 마파두부를 '동아시아 요리'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어떨까. 아마 세 나라 사람들 누구도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중일의 식문화가 뿌리부터 다르듯, 동남아시아 역시 국가와 지역별로 뚜렷한 개성과 방대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단지 우리가 잘 모를 뿐이다. 태국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자부심만큼이나 독자적인 미식 세계를 구축한 나라다.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중국 이민자들의 영향을 흡수하며 자신들만의 색깔로 식문화를 빚어냈다.
서울 서촌에서 태국이라는 나라의 고유한 색채를 타협 없이 그려내려는 요리사가 있다. 우연히 운명처럼 태국 음식의 거칠고도 섬세한 매력에 빠져 절구를 든 남자, '호라파(Horapa)'의 손승희 셰프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마음은 늘 도면 밖의 요리를 향해 있던 그였다.
연인 찾아 떠난 여정서 발견한 '운명적 맛'
"요리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어요. 그런데 성향상 프렌치 요리나 건축처럼 핀셋으로 정교하게 만지고, 센티미터 단위로 딱딱 떨어지는 건 재미가 없어 보였죠. 뭔가 좀 더 원초적인 걸 원했던 것 같아요."
태국 요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태국어를 전공하던 당시 여자친구이자 지금의 아내가 교환학생으로 방콕에 가게 되자 그녀를 만나러 떠난 여정이 그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태국 음식은 그에게 있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태국 요리의 모든 것이 너무 매력적이었죠. 겉보기엔 러프해 보이지만 맛은 다채롭고 섬세하다고 할까요. 절구에 재료를 넣고 거칠게 찧어내고, 센 불에 웍을 돌려 순식간에 볶아내죠. 과정은 투박하지만 완벽한 맛의 균형, 그 강렬한 대비에 매료된 거 같아요."
손 셰프는 그 길로 건축학도의 길을 접고 방콕에 위치한 르 꼬르동 블루에 등록했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에겐 유학 생활 매일이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 찬 천국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학교 일과가 끝나면 시장으로 달려가 널린 형형색색의 허브와 향신료를 직접 만지고 맛보며 태국의 맛을 체화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덕에 수많은 음식을 맛보고 식재료를 마음껏 탐구할 수 있었다.
1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온 그는 한국에서 태국 요리를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생각보다 태국 요리 경험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선택한 행선지는 런던이었다. 탕트 마리(Tante Marie) 요리학교에서 프렌치와 영국 요리의 기본기를 다지는 한편, 주말이면 당시 런던 미식 신을 강타하던 모던 타이 레스토랑들을 찾아다녔다. 전통에 기반을 두되 현대적인 감각과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풀어낸 런던의 태국 요리들은 그에게 또 다른 영감을 불어넣었다.
방콕의 뜨거운 열기와 런던의 세련된 감각을 모두 경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떠나기 전과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르틴'에서 샌드위치를 만들며 일할 때에도 머릿속은 온통 태국 요리로 가득 찼다. 결국 내 요리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그를 움직였다. 2020년부터 틈틈이 팝업 이벤트를 열어 남의 주방에서 그가 구현하고 싶었던 태국 요리를 만들어 냈다. 하루 매출 60만 원을 목표로 절구를 찧던 고단한 유목 요리사의 시간이었지만 자신의 색깔을 담은 음식을 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버텼다. 그리고 2023년 봄, 마침내 서촌의 한 골목에 '호라파'라는 간판을 걸었다. 호라파는 태국 바질을 뜻한다.
진짜배기 태국 음식 선뵈려는 고집
호라파의 주방에서는 둔탁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기계 대신 절구로 향신료를 찧는 소리다. 손 셰프는 이를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영역'이라 말한다. 시판 페이스트를 쓰면 편하겠지만, 그가 추구하는 진짜 태국의 향은 거기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삼끄르어(Sam Gleur)'가 있다. 태국어로 세 친구라는 뜻으로 마늘, 고수 뿌리, 백후추를 일컫는다. 한국 요리에 파와 마늘이 빠질 수 없듯, 태국 요리의 감칠맛과 향의 기둥이 되는 존재다.
"삼끄르어는 태국 요리의 근간이에요. 세 가지 재료를 절구에 넣고 짓이겨 페이스트를 만들면 각각의 재료가 낼 수 없는 제3의 감칠맛이 폭발하죠. 서양 요리의 미르푸아(양파, 당근, 샐러리)나 한국의 파·마늘 같은 존재죠. 기계로 갈아버리면 그 거친 입자감이 주는 뉘앙스와 향의 레이어가 사라져요."
그의 요리는 정직하다 못해 고집스럽다. 한국의 겨울은 태국 허브가 자라기에 척박하다. 향이 약해지는 시기엔 억지로 생허브를 고집하는 대신 건조 향신료의 비율을 높여 맛의 밸런스를 맞춘다. 계절에 따라, 재료의 상태에 따라 레시피는 유기적으로 변한다.
"손님들이 모르실 수는 있어도 저희는 알죠. 커리 페이스트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오늘 고수 뿌리의 향이 어떤지.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직접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요.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더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미쉐린이 인정한 노력... "무궁무진한 태국 미식 세계 전달할래요"
호라파의 메뉴판을 펼치면 우리가 흔히 알던 태국 식당의 문법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으레 있어야 할 팟타이의 자리는 보이지 않고, 대신 낯설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지의 이름들이 그 빈칸을 채우고 있다. 3일간 정성스레 염지한 돼지 머리를 튀겨낸 '후아무텃끄라티암'이나, 태국 북동부 이산(Isan) 지역의 거친 매력을 그대로 담은 다진 소고기 샐러드 '랍 느어'가 대표적이다.
특히 사전 예약으로만 맛볼 수 있는 태국 남부식 바비큐 치킨 커리 '까이 고를레'는 셰프의 고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숯불 위에서 커리 소스를 끊임없이 덧발라가며 구워내는 요리에는 효율성보다는 맛과 향의 극대화를 택한 요리사의 수고로운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재스민 쌀가루를 입혀 튀긴 가지에 세 가지 맛이 나는 소스를 곁들인 '마크아야오 텃 쌈롯'까지, 안전하고 익숙한 맛의 타협 대신 낯선 맛에 대한 설렘을 택한 호라파의 메뉴들은 태국 미식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오픈 1년도 채 되지 않아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4' 빕 구르망에 선정된 것은 그 고집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손 셰프에게 그 영광은 한동안 '지옥'과도 같았다.
"상을 받았다는 기쁨보다, 이걸 유지해야 한다는 공포가 더 컸습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주방 식구들과 자주 부딪히기도 했죠. 1년을 치열하게 앓고 나니 이제야 좀 강박을 내려놓았달까요. 중요한 건 타이틀을 지키는 게 아니라 오신 손님에게 태국의 다채로운 맛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걸 매일 되뇌죠."
그는 태국 요리로 스스로를 빛내기보다 무궁무진한 태국의 미식 세계를 보여주는 전달자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훗날 제대로 된 태국식 생면 쌀국수와 에그누들 가게를 열고, 언젠가는 태국 음식을 코스로 풀어내는 파인 다이닝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 호라파에선 동남아 음식이라는 모호한 단어 속에 가려져 있던 태국이라는 나라의 선명한 맛과 향이 손 셰프의 열정과 함께 오늘도 절구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레시피] 딸기 쏨 땀
<재료>
그린파파야 100g, 마늘 2개, 태국고추 1개, 방울토마토 5개, 땅콩 20g, 건새우 10g, 그린빈 약간, 팜슈가 40g, 타마린 20g, 라임즙 60g, 피시소스 10g, 딸기 4개
<만드는 법>
1. 절구에서 마늘과 고추를 먼저 빻아준다. 고추는 많이 빻을수록 매운맛이 강해진다.
2. 팜슈가를 넣고 잘 섞일 때까지 빻아준다.
3. 땅콩, 그린빈, 건새우를 넣고 살짝 으깬 뒤에 토마토를 넣어준다.
4. 토마토를 빻으면서 나온 즙으로 설탕을 녹여주면 된다.
5. 라임즙, 타마린을 넣고 잘 섞어준 뒤 간을 본다.
6. 원하는 산도와 당도가 나오면 피시소스를 넣은 뒤 잘 섞어준다.
7. 손질해 둔 그린파파야와 딸기를 넣어 섞어주며 완성한다.
그린파파야 100g, 마늘 2개, 태국고추 1개, 방울토마토 5개, 땅콩 20g, 건새우 10g, 그린빈 약간, 팜슈가 40g, 타마린 20g, 라임즙 60g, 피시소스 10g, 딸기 4개
<만드는 법>
1. 절구에서 마늘과 고추를 먼저 빻아준다. 고추는 많이 빻을수록 매운맛이 강해진다.
2. 팜슈가를 넣고 잘 섞일 때까지 빻아준다.
3. 땅콩, 그린빈, 건새우를 넣고 살짝 으깬 뒤에 토마토를 넣어준다.
4. 토마토를 빻으면서 나온 즙으로 설탕을 녹여주면 된다.
5. 라임즙, 타마린을 넣고 잘 섞어준 뒤 간을 본다.
6. 원하는 산도와 당도가 나오면 피시소스를 넣은 뒤 잘 섞어준다.
7. 손질해 둔 그린파파야와 딸기를 넣어 섞어주며 완성한다.
글·사진 장준우 어라우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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