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이후… 살아남은 이들을 찾아
2026.05.14 07:35
· 생육신 김시습은 '동봉' 수락산, 남효온은 서호~행주에 은거
· 한명회 압구정에서 박영효가 갑신정변 모의
· 노량진 사육신묘, 실제론 '七臣'
그런데 영화 속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단종애사哀史의 피바람을 살아 낸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실제 자취와 전설이 어린 서울 주변 산과 언덕들을 둘러보았다.
단종의 지위가 왕세자, 국왕, 상왕, 노산군으로 변하는 데 따라 단종비 정순왕후 송宋씨(1440~1521)도 세자빈, 왕후, 대비, 군부인君夫人으로 부침을 겪었고, 1457년 남편이 사사되자 관비官婢로 떨어졌다. 당시 열일곱 살. 실제 노역奴役을 하지는 않고 '정업원淨業院'이라는 절에서 81세까지 64년을 더 살았다.
정업원은 고려의 유풍으로, 왕실이나 대갓집 여자들이 남편이 죽은 뒤 비구니가 되어 들어가도록 한 절이다. 조선 들어 이전, 폐지, 복원을 거듭하다 1623년(광해군 15) 이후 더 이상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창경궁 맞은편 낙산 도성 밖인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에, 영조가 1771년 어필로 하사한 정업원 옛터 비석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있다(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송씨는 이곳에 머물며 매일 절 앞 동망봉東望峯에 올라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개국 이래 17세기 초 사실상 없어질 때까지 정업원은 거의 언제나 도성 안에 있었다. 사실은 영조 때 도성 밖 그곳을 정업원 옛터로 비정한 것부터가 오류였다. 어떤 착오나 정치적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순왕후 송씨는 인척인 해주 정씨의 남양주 묘역에 묻혔고, 단종 신원伸. 후 묘소는 사릉思陵으로 추존되었다. 부부가 몸은 떨어져 있으나 넋(신주)은 함께 종묘 영녕전에 모셔졌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이런 시조時調가 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을 유배지 영월로 호송(또는 사사를 집행)한 금부도사 왕방연王邦淵이 돌아오며 지었다고 하는데, 왕방연 이름은 정사正史엔 나오지 않고 오직 <청구영언> 같은 노래책들에 이 시조와 관련해서만 단편적으로 언급된다.
그 왕방연이 죄책감에 관직을 그만두고 서울 동쪽 불암산(또는 봉화산) 자락에 은거하며 배나무를 심었는데 그게 먹골배의 시조始祖라는 전설도 있다. 먹골은 지금 서울 중랑구 묵동墨洞인데 일대가 도시화되며, 먹골배의 본고장은 동쪽 남양주로 옮아갔다. 중랑구는 봉화산에 자연체험공원을 조성해 배밭을 복원하고 해마다 관내 영유아시설 등에 배나무를 무료 분양하고 있다.
살아서 은거한 생육신 중에서는 <금오신화>를 지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유명하다.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근처에서 올라가는 진달래능선 중턱 꼭대기에 매월정梅月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수락산에 은거했다는 김시습의 호 매월당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실제 김시습이 머문 곳은 반대편 남양주 청학동계곡이다. 김시습은 1470년대 약 10년간 옥류폭포 위쪽에 정사精舍를 지어 머물렀다고 한다. 김시습의 다른 호가 동봉東峯인데, 특정 봉우리라기보다 수락산이 서울의 동쪽이라 하여 그리 부른 것이다. 김시습은 수락산을 떠난 후에도 동봉이라는 호를 계속 썼고,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해 그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거기 있다.
김시습을 제대로 기린 건 100년 뒤 태어난 서계 박세당(1629~1703)과 그 아들 박태보(1654∼1689) 부자다. 박세당은 청절사라는 사당을 지어 김시습 영정을 봉안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석림암을 창건했다. 7호선 장암역에서 수락산으로 들어가는 석림사계곡 초입의 서계종택이 바로 박세당 옛집이고 뒤로 박세당 묘와, 계곡길 따라 노강서원, 석림사가 차례로 나온다. 노강서원이 바로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청절사가 있던 자리다. 박세당 아들 박태보를 기리는 노강서원은 본래 노량진에 있었는데 6·25 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8년에 지금 자리에 복원했다고 한다.
역시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김시습의 제자인 남효온(1454~1492)은 단종이 죽을 때 겨우 세 살이었는데 어떻게 생육신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첫째, 그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사육신'이란 이름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둘째, 단종의 생모를 복권시키는 주장을 펴다 은거했고, 이 일로 연산군 때 부관참시(관을 열고 목을 벰)까지 당했기 때문이다.
단종 어머니 권씨는 궁녀 출신으로, 남편 문종이 아직 세자일 때 세자빈 신분으로 원자를 낳고 이튿날 죽었다. 문종이 즉위한 후 현덕왕후로 추존하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사육신 거사 모의에 권씨 가족들이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이미 죽은 권씨도 폐서인廢庶人되었다. 성종 때 남효온은 '현덕왕후 소릉을 복위復位하자'는 상소를 올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을 버렸다.
남효온이 은거한 곳은 덕양산(행주산성)이 있는 경기도 행주幸州다. 지금 밤섬 일대가 서호(서강)인데 거기서는 단종 항렬인 종실 이총李摠(태종의 증손)이 '서호주인西湖主人'으로 자처하며 거문고로 소일했다. 남효온은 배로 행주와 서호를 오가며 이총과 교유했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기까지 했다.
서호가 은일 풍류를 상징한다면, 권귀權貴 풍류의 대명사는 영화에도 나오는 한명회(1415~1487)가 동호에 지은 압구정이다. 갈매기를 친구 삼겠다 하여 압구정狎鷗亭이지만 사람들은 '갈매기 압박하는' 압구정押鷗亭이라 흉봤다.
원래의 압구정은 단종이 죽기 전인 1454~1455년에 지어졌다가 한명회 사후 1516~1539년 사이 헐렸다. 그런데 겸재 정선이 1741년 그린 한양 십경十景 중 하나에 <압구정>이 있고 1872년 공문서 <광주전도廣州全圖>에도 압구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30년대쯤 다시 지어진 듯하다.
고종은 압구정을 철종 부마 박영효에게 하사했는데, 실패한 갑신정변(1884)의 '중요임무종사자' 국문 기록에 "압구정에서 모의했다"는 자백이 나온다. 아마 그 직후 몰수되어 파괴됐을 것이다.(이상 압구정 이력은 이세영, <정선 '압구정' 그림의 사료적 가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엮음, 《진경문화: 찬란한 우리 문화의 꽃》, 현암사, 2014년에서 간추림).
죽은 자들도 기억해 보자. <왕사남> 처음과 단종 꿈속에서 국문 받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들진 않았지만 그중 사육신이 있을 것이다. 한강변 노량진 언덕 사육신역사공원 안에 사육신 사당과 무덤이 있다. 실제 그들이 묻힌 곳은 알 수 없고, 이곳엔 각기 박씨·유씨·이씨·성씨의 묘라고만 새긴 무덤 4기가 있었다. 단종을 신원하고 1681년 이곳에 서원을 세우며 무덤들을 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의 것으로 간주했다. 1970년대에 하위지·류성원의 가묘假墓를 조성했는데, 이때 유응부 대신 김문기(1399~1456)를 넣어야 한다는 김녕김씨 문중의 요구를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받아들여 김문기 가묘까지 7위位를 모신 '칠신七臣' 묘가 됐다.
유응부가 포함된 사육신은 남효온의 <육신전>에 유래한다. 국편은 나중에 "사육신은 어차피 정사正史가 아닌 소설"이라며 <육신전>대로 유응부를 도로 넣고 김문기를 뺐다. 사실 김문기는 영월 장릉에 사육신보다 높은 '삼중신三重臣'으로 배향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육신전>의 유응부 대목에 실제는 김문기의 행적이 포함된 게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봄·가을 사육신 제사도 두 쪽으로 나뉜 채다. 유응부를 넣은 '사육신선양회'는 봄 제사를, 김문기를 넣은 '사육신현창회'는 가을 제사를 이곳에서 지낸다. 동작구는 노량진역에서 사육신역사공원 지나 한강변 따라 국립현충원 앞 동작역까지를 '동작충효길 3코스'로 운영하고 있다.
단종의 짧지만 비극적인 삶은 야담과 문학이 사랑할 설화소說話素로 가득하다. 본격 소설은 이광수가 1928~1929년에 연재한 <단종애사>가 처음이다. 이후 '단종애사'는 보통명사처럼 되었고, 세조와 단종은 TV 연속극과 영화에 단골로 소환되고, <왕사남>에서 역대급 신드롬이 되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순기능의 이면에, '역사물'이 역사와 혼동되고, 왕방연 시조와 사육신처럼 '정사화'된다는 우려도 있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중학교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