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더버터] 경험·관계·나눔, 청소년 장학의 세 가지 조건
2026.05.14 05:30
나현(가명)이는 ‘부사관’이라고 적어냈다. 딱히 직업군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취업할 수 있고 숙소도 준다고 해서요.” 꿈에도 사각지대가 있다.
성적도 성과도 요구하지 않는 이상한 장학사업이 있다. DB김준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사각지대 청소년 장학 ‘드림빅(Dream Big)’이다. 재단은 보육원과 그룹홈(공동생활가정), 위탁가정, 쉼터 등에서 생활하는 중학교 3학년생 40명을 매년 드림빅 장학생으로 뽑는다. 2024년 사업을 시작해 올해 3기를 선발했다.
이 장학의 목표는 오직 하나. 시설이나 위탁가정에 있는 아이들이 잘 자립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재단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4년간 매월 ‘꿈 장학금’을 지급한다. 강은정 DB김준기문화재단 상임이사는 “드림빅은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에게 ‘부모’ 역할을 대신 해주는 장학금”이라며 “아이들이 현실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꿈꾸고 실현할 수 있게 물심양면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한 우물을 파지 마라
“드림빅의 ‘빅’은 ‘큰 꿈’이 아니라 ‘많은 꿈’을 의미합니다. 꿈은 많을수록 좋고 언제든 바꿔도 됩니다.” 새 기수를 맞이하는 ‘출발 캠프’에서 강은정 상임이사는 매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드림빅 장학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꿈을 지원하는 유연한 장학금 ▶먼저 자립한 선배들의 지속적인 멘토링 ▶연결과 나눔의 가치를 체험하는 자원봉사 캠프 등이다.
장학금은 학생들이 각자 제출한 ‘꿈 계획서’에 따라 원하는 방식으로 지급된다. 영어·수학 학원비로도 쓸 수 있고 댄스 수업이나 보컬 트레이닝, 요리 강습을 받는 데 써도 된다. 재료비, 대회 참가비, 체험 활동비로도 사용할 수 있다. 장학금으로 영화를 보거나 K팝 콘서트를 관람하는 것도 가능하다. 꿈을 찾는 과정에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드림빅 2기 준서(가명)는 장학금으로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강습비와 대회 참가비, 도복비를 지원받았다. “체력적인 한계와 기술 부족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드림빅 활동을 하면서 꿈은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성실함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운동하면서 작은 부상을 겪고 주변 친구들도 부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오래 운동할 수 있게 돕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체육교사를 꿈꾸던 준서는 스포츠 물리치료사라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드림빅 운영사무국 역할을 하는 ‘틈틈’의 신선 대표는 “장학을 통해 아이들의 꿈이 바뀌는 걸 보면 무척 반갑다”고 했다. 신 대표는 보육원 출신의 자립청년 당사자다.
“저는 꿈이 없었어요. 어릴 때를 돌아보면 항상 초조했던 것 같아요. 자립에 대한 압박과 부담이 컸죠. 공부해서 사범대에 입학했는데 적성에 안 맞아서 방황을 오래 했습니다. 시설은 단체생활이라 개별 활동이 어려워요. 개인이 원하는 걸 해볼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시설 아동의 자립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관계
신선 대표는 “아이들에게는 장기적으로 함께하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어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드림빅은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멘토들이 쭉 함께하는 형태다. 장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별성이다. 비슷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멘토들에게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의 갈증을 풀고 문제를 해결한다.
“보육원에 사는 걸 친구들이 알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어요. 들키면 어쩌지, 마음 졸였는데 너무 멋진 멘토 선생님을 보면서 창피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친구들한테 제가 먼저 말했어요. 얘기하고 나니 정말 별거 아니던데요(웃음).” 드림빅 2기 수현(가명)이가 말했다.
멘토들의 다양한 직업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간호사, 공항 직원, 개발자, 사회복지사 등 각자의 위치에서 활동하는 여러 멘토를 만난다는 것 자체로 아이들은 시야가 넓어지게 된다.
신선 대표는 “시설 청소년들은 꿈의 선택지가 좁다”면서 “독립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꿈보다는 생계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보육원에 동생이 함께 있거나 돌봐야 할 가족이 있으면 책임감은 더 무거워집니다. 재능이나 적성을 알아볼 틈도 없이, 바로 취업해 돈을 벌 수 있는 몇 가지 직업 안에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드림빅 멘토들을 만나 달라지고 있어요. 아이들의 꿈이 확장되고 선명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나누는 인재’로 키우는 것
사각지대 청소년을 지원하는 사업들은 대개 성과 측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성적이 급격히 오른다거나 명문대에 합격하는 드라마틱한 성과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지 않다. 드림빅 장학이 지속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성과 측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은정 상임이사는 “재단이나 기업이 사회공헌의 성과를 측정하는 이유는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 성과가 포함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드림빅의 경우 설립자와 이사회 등 리더십이 이 프로그램에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운영할 수 있습니다. 리더십 차원에서 함께 장학의 원칙을 정하고 기획한 사업이라 실무자가 설득할 필요가 없죠.”
장학금 사용처나 멘토링 활동은 장학생이 주체적으로 의견을 내고 결정할 수 있지만, 자원봉사 활동은 재단에서 별도로 기획한다. ‘선한 인재 양성’이라는 미션은 재단의 전체 장학사업을 관통하는 맥락으로, 모든 장학에 자원봉사가 핵심 활동으로 포함돼 있다.
드림빅 장학생들은 2년 차때 필리핀 빈민촌으로 자원봉사를 간다. 빈민 가정에서 숙식하며 농사일을 돕고 페인트칠도 하고 시멘트 작업도 한다. “이런 데서 어떻게 자요?” 불평하던 아이들이 헤어질 때는 아쉬워서 현지 가족들을 부둥켜안고 운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바뀌었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고 나누는 삶에 대한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1~3기 장학생 중에는 졸업한 뒤에 ‘드림빅 서포터즈’가 돼 후배들을 돕겠다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도움받은 아이가 다시 도움을 주는 선순환 시스템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보육원 출신 멘토 선생님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요. 어린 시절의 선생님이 지금 나와 같은 느꼈다는 것이 반가웠고,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알려줘서 나아갈 힘이 생겼어요. 드림빅 장학생이 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됐죠.”
재단은 자립청년들로 구성된 ‘드림빅 서포터즈’의 커뮤니티 기능을 중장기적으로 더 강화할 예정이다. 또 장학생의 다양한 경험과 꿈을 지원하면서 장학생-멘토-재단의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윤대근 DB김준기문화재단 이사장은 “장학은 한 사람을 바꾸는 것을 넘어 한 사회를 바꾸는 일”이라며 “언젠가 ‘드림빅 서포터즈’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 그룹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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