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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항거한 것이 무슨 죄냐"... 법정과 거리에서 싸운 '시대의 의인'

2026.05.13 17:21

1980년 5월 탱크 앞세운 계엄군 맞서 '죽음의 행진' 나선 홍남순 변호사
 1980년 5.18민주화운동 직후 신군부가 상무대에 설치한 군사법정. 재판부는 군인으로 채워졌고, 재판은 총을 든 헌병이 지켜선 가운데 각본대로 진행됐다. 광주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 이돈삼

"불의에 항거하여 올바르게 산 것이 무슨 죄가 있는가? 모두 석방해야 한다. 나는 나이 먹어 법조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 수습위원 활동이 불법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5․18민주화운동 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한 홍남순(1912~2006) 변호사의 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 가운데 일부분이다. 당시 고등군법회의는 홍남순에게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광주에 살고 있던 홍남순은 신군부의 예비검속을 피해 18일 서울로 몸을 피했다. 홍남순이 떠난 그날 광주에선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시위가 다시 시작됐고, 신군부는 야만적인 폭력으로 맞섰다.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군홧발에 짓밟힌 광주. 신군부의 시민 학살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된 비상계엄으로 본격화됐다. 광주 5.18기념공원에 있는 동판이다.
ⓒ 이돈삼

서울에서 광주 소식을 전해 들은 홍남순은 21일 다시 내려왔다. '죽어도 광주에서 죽고, 살아도 광주에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5월 21일은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학살당한 날이었다. 홍남순은 이튿날부터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

홍남순은 5월 26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맞서는 '죽음의 행진'에 참가했다. 행진에는 홍남순 외에도 성직자, 교수 등 17명이 함께했다. 행진 참가자들은 전투교육사령부에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계엄군의 최후통첩이었다.

광주YWCA로 돌아와 대책을 논의한 수습대책위원들은 홍남순과 김성용을 서울에 보내기로 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광주 상황을 알리고, 유혈 진압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홍남순은 윤보선을 만나러 상경길에 올랐다. 하지만 송정리를 지나 극락강다리 검문소에서 계엄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주춧돌

 5.18역사공원으로 개방된 옛 505보안부대. 당시 보안부대는 신군부의 정권 찬탈과 집권 안정에 앞장선 전위부대였다.
ⓒ 이돈삼

홍남순은 505보안부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옆방에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한 수습대책위원들의 절규였다. 항쟁지도부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행해졌다. 홍남순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문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웠다.

계엄사 합동수사단은 홍남순에 내란수괴 혐의를 씌웠다.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폭동을 일으키고, 폭도들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홍남순은 수사관들의 서슬 퍼런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군사법정에서도 신군부를 꾸짖으며 광주항쟁의 정당함을 주장했다.

 생전 홍남순 변호사(왼쪽)와 벽그림으로 만난 홍남순 변호사. 벽그림은 그의 태 자리인 화순군 도곡면 모산마을에 그려져 있다.
ⓒ 이돈삼

1981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교도소를 나온 홍남순은 더욱 굳건하게 시민의 편에 섰다. 83년 5월 원풍모방노조 폭력 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다. 84년 8월 5․18구속자협의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1985년 5월엔 5․18민중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시민 명예 회복에 앞장섰다.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0년대 중반이었다.

홍남순은 86년 3월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창립과 직선제개헌 추진위원회 광주지부 결성, 87년 5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 결성을 이끌었다. 87년 9월엔 미국에서 돌아온 김대중의 광주방문 준비위원장을 맡아 망월동 5․18묘역을 함께 참배했다. 엄혹한 시절 그의 열정과 헌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됐다.

 홍남순기념관으로 조성되는 광주 생가. 광주문화방송 옛터와 중앙초등학교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사법살인'이 일상이던 시절, 홍남순은 독재에 맞선 양심수들의 바람막이를 자청하며 '법정의 투사'로 살았다. 유신 치하에서 각종 시국사건과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맡아 무료 변론한 것은 그의 일상이었다. 무료 변론은 1965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함성지' 사건,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이어졌다.

'함성지'는 1973년 전남대학생 박석무와 김남주 등이 유신독재 비판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3․1민주구국선언은 1976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념미사를 빌미로 재야인사를 구속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1978년 송기숙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국민교육헌장에 맞서 발표한 '우리교육지표' 사건 변론도 그가 맡았다.

78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 긴급조치 위반 사건, 79년 동일방직과 YH노조 투쟁 지원 사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시해 사건, 그리고 80년 계엄포고령과 반공법 위반 사건 등 그의 무료 변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

 홍남순기념관으로 조성되는 광주 생가. 당초 올 초 개관에서 5월로 연기되더니, 개관이 또 다시 연기됐다.
ⓒ 이돈삼

홍남순은 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 수십 건을 맡아 변호하며 '긴급조치 전문 변호사'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그는 법정에서 결코 법조문으로 변론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데서 우러나온 양심과 정의로 변호했다. 홍남순이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린 이유다. 덕성과 지혜를 갖춘 대인, 공익과 원칙을 중시한 큰어른으로 통했다.

"홍남순 변호사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에 맞서 법정과 거리에서 싸웠습니다. 법정에서는 법으로 탄압받는 양심수를 위해, 거리에선 민주투사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굳은 절개와 양심으로,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마음으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광주는 그분을 '무등의 대인' '시대의 의인'으로 부르고 존경하며, 그분을 중심으로 민주와 인권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겁니다."

허연식 홍남순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말이다.

 홍남순과 부인 윤이정 묘.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다.
ⓒ 이돈삼

광주광역시 동구 궁동에 있는 홍남순 변호사 옛집이 5․18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이 집에는 70⁓80년대 민주인사들이 자주 모여 토론하고 대책을 협의하면서 '민주사랑방'으로 불렸다. 큰 은행나무가 있다고 '은행나무집'으로도 통한 집은 변호사 사무실과 사랑방, 안방과 부엌 등으로 이뤄져 있다. 생전 홍남순 변호사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념관으로 조성되고 있다.

홍남순 기념관에서는 홍남순의 생애를 대한민국 헌정사, 민주주의 발전사 등과 함께 전시한다. 70⁓80년대 주요 시국사건을 중심으로 그의 민주·인권 변호사 활동,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를 지키기 위해 함께했던 활동도 보여줄 예정이다.

 화순 모산마을에 있는 홍남순 생가. 홍 변호사는 지금도 마을주민의 자랑이고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 이돈삼

홍남순의 태 자리인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모산마을에도 생가가 복원돼 있다. 모산마을은 유엔 세계관광기구가 선정한 '최우수 관광마을'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 유적도 여기에 있다.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은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모산마을에서 춘양면 대신리 지동마을까지 4㎞ 구간에 흩어져 있다. 모두 596기에 이른다.

홍남순 생가에는 그의 동상과 함께 '時窮節乃見'(시궁절내견) 현판이 걸려 있다. 궁할 때, 그 사람의 절제된 삶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남송시대 시인 문천상의 '정기가'에 나온 구절로, 홍남순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귀다.

'못 살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죽음에 이를 때에도 아무런 부끄럼이 없이, 역사 앞에 발을 뻗을 수 있다.' '불의에 항거하고 올바르게 산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냐. 다 석방해야 한다. 나는 법조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생가 벽면에 새겨진 그의 어록도 발걸음을 붙잡는다.

홍남순 변호사는 현재 국립5․18민주묘지에 부인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부인 윤이정도 홍남순과 함께 은행나무 집에 살며 시민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광주의 어머니로 불렸다.

 홍남순 변호사의 태 자리인 화순 모산마을 풍경.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유엔세계관광기구 선정 최우수 관광마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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