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전
80년 5월 무명 시민군을 찾아서 [왜냐면]
2026.05.13 18:04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소년 시민군으로 참가한 나는 5월24일 광주 남구 송암동에서 제11공수특전여단의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됐다. 당시 함께 피신해 있던 동료 시민군은 우측 관자놀이에 총상으로, 또 다른 시민군은 계엄군 대검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전재수, 중학교 1학년이던 방광범, 주부 박아무개씨를 포함해 동네 주민 9명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운명하였고 심지어 농가의 젖소와 수백 마리의 칠면조까지 떼죽음을 당했다.
송암동 양민학살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계엄군에 체포돼 보안사를 경유하여 전투교육사령부 예하 헌병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그해 7월1일 보안사(현 방첩사) 요원들에 의해 몸을 결박당한 채 현장 검증을 하기 위해 송암동을 다시 가야 했다. 양민학살 당시 내가 피신했던 민가의 주인(이백윤)으로부터 사살 당한 시민군의 시신을 인근 금당산에 가매장했으나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 군인들이 다시 찾아와 매장된 시민군의 시신을 파 갔다는 증언을 듣게 되었다.
1988년이 되어서야 광주광역시와 평화민주당(현 민주당)의 주도로 5·18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당시 사건을 제보하여 송암동 양민학살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1989년 2월22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한 바 있다.
동료 시민군의 시신을 찾기 위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도 진정하였다. 국방부 조사관도 송암동에서 희생당한 시민군의 사건은 인지하고 있었고, 자기들 권한으로 제11공수특전여단을 상대로 시신의 행방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라며 더 이상 조사를 진척할 수 없다고 하였다. 5·18 희생자 가운데 가족이 없는 경우에는 행방불명조차 신고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동료 시민군 역시 신고할 가족이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죄책감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서지 않으면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스러져간 무명 시민군을 누가 대신해서 찾아줄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이후 광주광역시와 5·18 관련 재단과 함께 시신의 행방을 결정적으로 제공하는 분에게 현상금 2천만원을 지급하겠다는 신문광고를 게재하였다. 인간의 기억은 때론 망각할 수 있지만 역사는 기록을 통해 진실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5·18 당시 시민군을 최초로 결성하였던 광주공원에 동료 시민군을 기억하는 동상을 조성했다.
5월 학살로부터 4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날의 기억은 결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생생함이 나를 망각시키지 않으려고 붙잡고 있다. 내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계엄군을 만류한 당시 계엄군(제11공수특전여단 62대대) 장교였던 대위도 생존해 있다면 만나고 싶다. 투항한 시민군에게 방아쇠를 당긴 그 계엄군도 죽기 전에 진실을 드러내면 자신에게 짊어진 삶도 한결 가벼워진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송암동 인근 야산에 매복해 있던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이동 중인 11공수특전여단 병력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90㎜ 무반동총을 발사하고 클레이모어를 터트리는 바람에 사망한 계엄군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전사자로 안장되어 있다. 반면에 가족이 없어 행방불명 신고마저 할 수 없는 무명 시민군은 어느 암매장지에 묻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가 양지바른 묘지로 옮겨졌을 때 나는 국립5·18민주묘지를 용기 내서 참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는 무명 열사들의 외침이 내 곁에서 머무는 한, 5월은 기념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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