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클러스터 꿈꾸는 홍릉, 아파트 숲이 발목 잡나 [최준호의 사이언스&]
2026.05.13 17:01
한때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홍릉. 고종 승하 후 능은 남양주 금곡으로 옮겨갔지만, 한 세월이 흐른 뒤 이곳은 과학입국의 성지로 재탄생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한민국 최초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KIST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그때만 해도 홍릉은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중공업을 일으킨 포항제철 설립의 구상도, 미사일 등 자주국방 무기들을 개발한 국방과학연구소(ADD)도 여기서 출발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삼성·현대·SK 같은 기업들이 글로벌 거인으로 성장하며 자체 연구소를 세우고 인재를 흡수했다. 그사이 정부 연구소들은 대전 등지로 하나둘 떠났다. 남은 연구소의 역할은 예전만 못했고, 주변 상권은 노후화됐다. 대한민국 성장의 엔진이었던 홍릉은 그렇게 도시의 섬처럼 고립되며 늙어갔다.
홍릉 연구부지에 웬 아파트
세월 속에 외면받아온 홍릉이 최근 갑자기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 1월 말 정부의 수도권 주택공급 방안 발표 때문이었다. 국토교통부와 재정경제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공개한 ‘도심 주택공급 확대 및 신속화 방안’에 홍릉 국방연구원(KIDA)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세종시로 이전한 뒤 들어선 글로벌지식협력단지 자리에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애초 계획엔 지방 이전을 전제로 KIST 부지까지 포함됐다가 과학계의 격렬한 반발로 취소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주택공급 실적이라는 성적표가 급한 중앙정부의 눈에는, 반세기 넘게 지켜온 국가 연구소들의 부지가 그저 아파트를 올리기 쉬운 노는 땅으로 보였을 터다. 굳이 주택공급 방안이 아니어도 글로벌지식협력단지는 그간 부처 이기주의의 대표적 사례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연구소나 기술이전 또는 벤처기업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땅주인인 재정경제부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최근에는 홍릉강소연구개발특구사업단이 입주를 협의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홍릉밸리 외곽인 하월곡동으로 가야만 했다. 옛 KDI 건물은 지금 전시관과 도서관·카페·연수시설 등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결국은 아파트촌으로 전락할 신세가 됐다. 힘센 경제부처의 몽니가 낳은 망국적 서사다.
지역 혁신생태계와 지자체는 중앙정부의 일방적 발표에 반발하고 있다. 국방연구원은 연구원 이전을 반대하면서 테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동대문구는 "홍릉 개발은 단순한 주택 공급 확대를 넘어 홍릉강소연구개발특구와 연결해 구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 4월에는 ‘홍릉 일대 지역거점 발전전략 구상 용역’을 착수하면서 홍릉 일대를 연구개발과 주거 기능이 조화를 이루는 복합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을 구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모두가 지난 1월 중앙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수포가 될 일이다.
바이오스타트업 120여 개 배출
기초자치단체나 연구소의 단순한 이기주의가 아니다. 홍릉은 그간 쇠락의 틈새에서 국가의 미래를 만들어낼 부활의 싹을 조금씩 키워오고 있었다. 2012년 고려대·KIST·경희대 등이 모인 홍릉포럼 출범을 기점으로 자생적 변화를 시작했다. 2017년 서울시가 세운 서울바이오허브는 바이오·의료 창업의 메카가 되었고, 2020년 지정된 홍릉강소연구개발특구는 대학과 연구기관이 보유한 기술을 시장으로 연결하는 딥테크 창업 실험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씨를 뿌렸다고 다 밭이 되는 건 아니지만, 홍릉의 변화는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최근 확인된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홍릉바이오허브에서만 이미 126개가 넘는 바이오 스타트업을 배출했다. 대한민국은 이미 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 등 세계 10위권 내 대형병원을 다수 보유한 의료강국이다. 홍릉특구 내에는 고려대와 경희대 병원도 있다. 이들 병원의 임상 데이터와 기초과학이 만나는 접점이 홍릉이다. 대학과 연구소의 기초연구 성과도 병원과 협업을 통해 혁신을 만들어낸다. 홍릉강소연구개발특구와 서울바이오허브는 산파 역할을 통해 시장으로 나가는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홍릉엔 어느덧 R&D 패러독스를 극복할 스타들도 성장하고 있다. 고려대 기계공학과의 홍대희 교수와 제자 김병곤 박사가 2019년 공동창업한 엔도로보틱스는 내시경 수술로봇으로 최근까지 500억원에 가까운 투자를 유치했고, 글로벌 내시경 기업인 올림푸스와 독점유통 계약까지 끌어냈다. KIST 뇌과학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2021년 창업한 큐어버스는 3년 만에 글로벌 제약사 안젤리니와 50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을 하는 성과를 올렸다. 출연연 연구소기업으론 역대 최대 규모다. 영국 런던의 슬럼가였던 동북지역이 '테크시티'로 변모했듯, 홍릉 역시 인재들이 살고 싶은 환경만 갖춰진다면 유럽과 미국의 거물급 벤처캐피털들이 줄을 설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홍릉은 한국판 보스턴 클러스터의 꿈을 꾼다. 미국 보스턴은 하버드와 매사추세츠공대(MIT)와 MGH(매사추세츠 종합병원) 같은 세계적 병원, 그리고 화이자·모더나 등 글로벌 빅파마와 수천 개의 벤처캐피털이 한데 어우러져 명실상부한 세계 혁신 바이오산업의 심장 역할을 한다. 홍릉 역시 지리적 요건만큼은 보스턴 못지않다. 다만 부족한 것은 이들 연구기관의 기술을 담아낼 그릇, 즉 성장한 스타트업과 협업을 원하는 대기업·투자사가 들어설 인프라다. 국방연구원과 옛 KDI 부지가 특히 논란의 핵심이 되는 건, 이 두 곳이 홍릉이 보스턴 클러스터처럼 확장하기 위한 몇 안 되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소관 국토교통부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홍릉의 잠재력을 알지 못했을까. 아니면 유휴부지를 긁어모으다 보니 홍릉을 뺄 수 없었던 걸까. 정부의 리더십이 부재한 사이 홍릉은 이미 국내 최대 혁신클러스터 후보지로서의 잠재력 기회를 조금씩 놓치고 있다. KIST 앞 청량리동과 제기동 일대 노후 주택 재개발사업이 누더기로 추진되고 있다.
집창촌 재개발엔 전례 없는 특혜
홍릉강소특구 입장에선 어이없는 일도 있다. 홍릉에서 불과 2㎞ 떨어진 청량리역 일대가 그곳이다. 과거 588이라 불리던 집창촌 자리는 이제 65층 규모의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들이 용적률 1000%에 육박하는 기적을 쓰며 강북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다. 자본의 논리는 이토록 빠르고 강력하다. 청량리는 상업적 욕망이 투영된 마천루를 얻었지만, 그 화려한 건물들 속에 국가의 미래전략이 담겨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해진다. 홍릉의 역설이다. 청량리의 초고층 빌딩 숲이 소비의 공간이라면, 홍릉의 낡은 부지는 생산의 공간이어야 한다. 청량리 집창촌이 용적률 1000%의 혜택을 받아 주거·상업 중심지로 변모했다면, 홍릉 역시 그에 걸맞은 파격적인 용적률 인센티브와 규제 완화를 통해 혁신의 마천루를 세워야 한다. 국토부가 홍릉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것은, 세계적인 연구소 옆에 잠만 자는 침실을 만들겠다는 소리와 같다. 홍릉의 낡은 골목길과 중앙정부의 일방적 정책과 규제에 갇힌 연구소들이 묻고 있다. 과거의 현재·미래가 얽혀있는 홍릉을 아파트 숲으로 가릴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혁신의 영토로 지켜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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