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김명희 개인전
폐교서 시작된 칠판 그림
시대 풍경과 자화상 담아
회화 넘어 미디어아트로 확장
김명희의 ‘분수놀이’(2011) <갤러리현대>“칠판은 우리가 생각하는 걸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지울 수 있는 관대한 존재에요.”
1990년 강원도 춘천 내평리의 한 폐교, 김명희(77) 작가는 그곳에 버려진 칠판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캔버스와 물감 대신 칠판과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린 지 40년이 다 돼 간다. 잠자리채를 든 채 자연을 누비는 아이들부터 가사 노동을 하는 자신의 자화상까지, 작가는 칠판 위에 시대의 풍경을 기록하고 이를 미디어아트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며 쉼 없이 나아가고 있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은 작가의 50여년간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전시다. 1980년대 뉴욕 시기의 목탄 드로잉부터 1990년대 이후 본격화한 칠판 회화, 영상이 결합된 미디어 작업, 자화상 연작까지 40여 점을 선보인다.
김명희의 ‘서울에서 온 소년’(2004) <갤러리현대>작가가 칠판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내평리에 있는 폐교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1990년대 초 미국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 공간을 찾던 그는 소양강댐 건설 이후 수몰된 마을 인근의 폐교를 발견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버려진 칠판에 처음 소년의 얼굴을 그려본 순간 새겨지는 이미지의 힘에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그는 검은 미국식 칠판과 짙은 녹색의 한국 칠판 위에 오일파스텔로 빛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김명희의 ‘차경, 가을’(2015) <갤러리현대>내평리 연못의 사계절을 담은 ‘차경’ 연작은 수면 위에 비치는 자연과 반짝이는 햇빛을 표현한 작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을 그린 화면은 실제 풍경의 재현이라기보다 기억 속 이미지에 가깝다. 작가는 “바로크 시대 화가처럼 어두운 바탕 위에 빛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김명희의 ‘내가 결석한 소풍날 09’(2009) <갤러리현대>전쟁 후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군상 연작도 눈길을 끈다. 소풍을 나온 아이들, 분수대에서 뛰노는 아이들 등 시대를 대표하는 풍경을 그렸다. 1950년대 아이들을 그린 그림에는 칠판 위에 원자폭탄 공식 기호를 겹쳐 넣어 시대의 불안과 기억을 함께 담아냈다.
김명희의 ‘전쟁이 지난 후’(2024) <갤러리현대>작가는 뉴멕시코와 블라디보스토크, 타슈켄트 등을 여행하면서도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작은 이동용 칠판에 풍경을 그리고, 여행 중 만난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의 초상을 남겼다. 작가는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나 노마드보다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앰뷸런트(ambulant)’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김명희의 ‘시베리아 길’(2004) <갤러리현대>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아온 작가는 디아스포라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전시장에는 1997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서 만난 고려인 디아스포라 초상 연작이 걸렸다. 강제 이주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고려인들의 얼굴은 공산당 배지와 무슬림 복장이 뒤섞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나라를 잃으면 정체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작가의 작업은 미디어아트로 확장됐다. 그는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영상을 칠판 회화 속에 삽입해 ‘움직이는 그림’을 만든다. 흔들리는 버드나무, 빗물 맺힌 차창 밖 풍경, 춘천 소양호에서 춤추는 자신의 모습 등을 촬영해 칠판 그림과 결합시켰다.
김명희의 ‘김치 담그는 날 2025’(2025) <갤러리현대>전시장에는 칠판에 그린 작가의 자화상 연작도 전시됐다. 예술가이자 주부로서의 정체성이 동시에 드러난다. 집안일을 하는 작가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강하고 단단해 보인다. 김장을 하기 위해 재료를 다듬거나, 다림질을 하는 일상의 장면에 지구본이나 세계지도를 그려 넣었다. 한정된 공간에 머물면서도 늘 세계를 향해 시선을 던졌던 작가의 노마드적 기질을 상징한다.
김명희의 ‘차경, 겨울’(2014) <갤러리현대>칠판 그림을 보다 보면 보면 학창 시절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아이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포착하면서도 회화와 영상을 넘나드는 실험을 이어가는 작가의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