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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된 서포 김만중을 지켜보는 누운 호랑이 [경상도의 숨은 명산 호구산]

2026.05.13 07:30

남해 송등산·호구산
544m 바위전망대에서 본 풍광.
산꾼들에게 '남해' 하면 누구나 금산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긴 보리암을 말한다. 하지만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금산에 가려져 있지만 도무지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송등산과 호구산이다. 암릉과 능선, 바다로 이어지는 길은 말 그대로 '숨은 명산'답다.

남해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붉은 아치의 남해대교를 지나고, 2018년에 개통된 노량대교에 올라서는 순간 바다의 기운이 먼저 다가온다. 봄을 머금은 바람은 짭짤한 향기로 코끝을 스치고 햇살을 머금은 수면은 살아 움직이는 듯 반짝거린다. 섬과 빛, 바람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미 산행의 절반을 채운 듯했다.

용문사 천왕문.
'미국마을'로 접어들자 풍경은 또 한 번 변한다. 아담한 사이즈의 자유의 여신상이 먼저 시선을 끌고 하늘 높이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길 너머로 여유롭게 자리 잡은 주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정형화되지 않은 배치, 그리고 한적한 거리의 공기까지 마치 미국 어느 마을을 옮겨 놓은 듯 조용하면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공간을 채운다.

천년고찰에서 시작되는 길

용문사 일주문에 도착하자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진다. '마음을 씻는 다리' 세심교를 건너며 오늘의 안전산행을 기원하고 불법을 지키는 사천왕을 모시는 천왕각으로 향했다. 전국 3대 자장도량의 하나로 불리는 용문사의 천왕각 목조사천왕상은 독특하다. 그가 짓밟고 있는 양반과 탐관오리에게 눈길이 간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민초를 향했던 사찰의 정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사용했다는 길이 6.7m의 거대한 구유통도 눈길을 끈다.

백련암.
호랑이가 누운 형상을 닮은 호구산 자락 아래 흐르는 계곡물은 여름에도 차갑기로 유명하다. 용문사를 지나 백련암, 염불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점점 고요해진다. 인적은 없고 어디선가 방울 굴리는 새소리만 들려오는 염불암 입구에는 '수행중'이란 표지가 붙었다. 숨소리조차 낮춰 지나간다. 염불암 기와 위로는 쏟아지는 햇살을 오롯이 온몸으로 받아내어 겨우내 움츠렸던 생의 의지를 다시 드높이는 작은 식물들이 선명하다.

호구산으로 오르는 길은 백련암 입구와 염불암 뒤편 두 갈래가 있지만, 우리는 용문사와 염불암을 둘러본 뒤 전망바위를 보기 위해 다시 백련암으로 돌아가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백련암은 수행처로 이름난 곳으로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용성스님과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석우스님, 성철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다.

정갈한 암자 마당 한편에 활짝 핀 하얀 목련꽃이 유난히 고요하고도 맑게 느껴졌다. 송등산·호구산 이정표를 보고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자 편백 숲이 길을 감싼다. 독경소리는 멀어지고 청아한 새소리가 대신 숲을 채운다. 가벼운 발걸음 위로 포근한 보랏빛 봄기운이 내려앉는다.

능선과 암릉에 핀 얼레지들.
암릉 위에서 만난 바다

얼레지 군락지에 이르자 모두 발걸음을 멈춘다. 저마다 아는 만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연보랏빛과 분홍빛 사이를 오가는 꽃잎이 뒤로 말리며 피어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람난 여인', '질투', '순수한 사랑'이라는 제각각인 꽃말처럼 이 작은 꽃은 시간에 따라 표정을 바꾼다. 자연은 말없이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꽃구경은 오르막에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로 묻혀간다. 몸은 힘들지만 시선은 여전히 꽃에 머문 채 놓지 못한다. 얼레지에 빠져 경사를 오르다 첫 안부의 벤치는 그런 심정을 이해하듯 조용히 자리를 내어준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된비알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다. 무채색 몸을 온전히 드러낸 암릉들도 오르고, 또 로프가 있는 리지길을 넘자 544m 전망봉(망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시야가 터지듯 열린다. 환희의 탄성 소리가 햇살을 뚫고 솟아오른다. 쪽빛 바다로 둘러싸인 섬 남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로 꼽히는 앵강만이다. 마치 나비가 두 날개를 펼친 모양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으로 꾀꼬리 앵鶯자에 물 강江자를 쓰지만 정확한 이름의 내력은 미궁 속이다.

호구산 정상 조망.
멀리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와 사방으로 점처럼 흩어진 섬들이 펼쳐진다. 우리가 가야 할 호구산 정상, 멀리 금산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이 산을 찾은 이유를 단번에 설명해 준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게 만드는 풍경이다.

바위 전망대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어 송등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송등산·호구산 갈림길에서 800m 앞 송등산으로 나아간다. 송등산을 향하는 길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들, 가지마다 솜털 같은 잎들이 봄을 먼저 감지한 듯하다. 산은 계절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존재라는 말이 실감난다. 송등산 정상에 서니 남해지맥의 괴음산~송등산~호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또렷하다.

송등산 정상
호구산 정상
송등산 해발 617.2m 정상석과 괴음산 방향 1.7km, 호구산 방향 2.5km 이정표를 확인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흐르듯 이어지는 산의 결을 따라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호구산을 향한다. 막힘없는 시야에 호구산 정상이 들어온다. 바람 끝에 감기던 서늘한 기운은 어느덧 가시고 가벼운 포근함이 다가온다. 곳곳에 쌓여 있는 석축에 그려놓은 듯 피어난 지의류와 이끼들이 본연의 모습으로 남아 있어 반갑다.

정상 직전(호구산 0.1km/염불암 0.7km) 암릉구간은 다시 집중을 요한다. 염불암 0.7km 이정표를 보고 호구산 최단 코스임을 알 수 있었다. 로프와 목책을 잡고 마지막 힘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호구산 정상.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봉수대다. 조선시대 때 적의 침입 등을 알리는 군사 통신 수단으로 동쪽의 금산과 서쪽의 설흘산을 잇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금은 전망의 중심이 되었다. 창선도, 설흘산, 괴음산, 노도, 앵강만, 금산까지 한눈에 펼쳐진다.

호구산 봉수대.
누운 호랑이 닮은 호구산

특히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와 어머니를 위로하는 '구운몽'을 집필한 서포 김만중 유배지 노도는 이 풍경 속에서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봉수대가 만들어 준 네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작은 그늘 아래에서 최고의 휴식을 선물 받는다. 남해 중앙시장에서 사 온 떡과 바나나우유, 커피를 나누며 시선은 북동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창선도 대방산 그 너머 사천 와룡산을 향했다. 발아래 마을은 마치 동화책 한 페이지처럼 고요하고 따뜻했다. 마늘로 유명한 남해의 초록빛 밭들이 정갈하게 펼쳐져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호구산 정상석에는 '납猿산 626.7m'라 적혀 있었다. 왜 호구산을 납산이라고 할까? 납은 옛말로 원숭이를 뜻하며, 원숭이 원猿자를 써서 원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호구산은 산의 형상이 호랑이가 누운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유래했다.

돗틀바위.
호구산을 뒤로 하고 나무 데크를 통해 돗틀바위, 앵강고개, 헬기장 방향으로 하산한다. 호구산에서 돗틀바위까지 약 800m는 비교적 무난한 길이다. 돗자리를 짜는 틀을 닮았다는 이름처럼 독특한 형태의 바위가 멀리서부터 자태를 뽐내고 있다.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하는 바위의 위세가 도도하고 웅장하며 호위무사 같은 소나무 또한 눈길을 끈다. 호구산의 여느 바위와 어우러져 옹골찬 기백으로 앵강만을 아우른다.

돗틀바위를 돌아 급경사에 설치되어 있는 빨간 철근 계단은 난간이 없어 잠시 당황하게 만든다. 아마 자연훼손을 최소화해 산꾼들을 위해 만들어둔 듯하다. 한 발짝을 놓기도 어려운 좁은 철계단에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내려선 너덜은 짧지만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구간이었다.

하산 길에 만난 숲.
돗틀바위에서 500m 내려오면 수려함을 뽐내는 삼나무 숲이다.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진다. 시원한 바람이 산행의 진득진득한 땀내를 털어내어 발걸음이 간결해진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청주한씨평장묘원' 표석에서 우회전하면 용문사 일주문이 보이며 산행은 마무리된다. 남해한려해상국립공원의 바다와 섬, 그리고 암릉과 숲길이 어우러진 봄의 여정이었다.

산행길잡이

용문사 일주문 주차장을 들머리로 하여 천년고찰 용문사, 백련암, 염불암 경내를 구경한다. 백련암 방향으로 오르다 544m 바위전망대 직전 까칠하고 짧은 암릉 구간에서 남해바다, 호구산 정상을 조망한다. 편안한 능선을 따라 송등산 다녀온 후 다시 호구산 방면으로 가다 암릉 로프 목책구간을 5분 정도 오르면 정상이다. 정상 봉수대서 사천 방향, 남해 금산, 남해바다 조망이 하이라이트다.

정상에서 석평마을 방향으로 돗틀바위 전까지 편안하다. 돗틀바위를 지나면 난간 없는 빨간 철계단 등 가파른 너덜구간이 있다. 편백나무, 삼나무숲을 지나 용문사 갈림길 임도길 따라 '청주한씨평장묘원' 비석돌이 보이면 우회전, 일주문에서 산행 종료다.

교통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남해공용터미널에서 하루 2회 운행하는 401번 버스로 미국마을에서 하차해 도보로 약 1km를 이동해야 한다. 따라서 택시나 자가용 이용을 추천. 용문사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맛집(지역번호 055)

난향(863-1455)은 황태 해장 칼국수 맛집이다. 황태와 홍합의 조합이 불러오는 바다 향과 시원한 국물 맛으로 인기가 매우 높다. 거의 무조건 웨이팅이 있다고 봐야 한다. 라스트 오더 13시30분. 재료소진 시 조기 영업 종료.

앵강만 식당(863-3308)은 지역특산물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좁고 유속이 빠른 남해 해협에서 지역 전통 어획법인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로 만든 멸치쌈밥을 내놓는다. 쌈채소에 멸치와 밥을 올려먹는 방식이다. 멸치쌈밥 및 갈치조림 2인 2만 5,000원.

앵강연화(0507-1399-1298)는 남해에 숨은 보석 같은 카페다. 아늑한 분위기로 핸드드립 커피와 양송이스프 세트가 인기 메뉴다. 디저트로는 독특한 풍미의 수제 당근케이크와 포카치아 등이 있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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