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학살 은폐”…베네치아에 울려 퍼진 “러·이스라엘 전시 거부”
2026.05.12 17:20
“예술로 대량학살을 은폐하지 말라!”
“예술은 전쟁의 책임을 씻는 수단이 아니다!”
지난 8일(현지시각) 저녁 무렵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옛 조선소 시설인 아르세날레의 운하 수로변에서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격앙된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세계 각지에서 온 미술가들과 사회활동가들이 운하를 따라 행진하며 외친 구호다. 이들은 다음날 아르세날레에서 공식 개막한 세계 최대 국제미술잔치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61회 국가관 전시에 우크라이나·가자지구의 학살 전쟁을 유발한 러시아와 이스라엘이 참여한 사실에 항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20여개 국가관이 모인 카스텔로 공원 들머리의 가리발디 거리에서 집회를 시작한 뒤 아르세날레 내부 공장 건물에 차린 본전시, 국가관 전시장 쪽으로 펼침막을 들고 진입하려 했으나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제지하자 몸싸움을 벌이며 충돌했다. 같은 시각 인근 카스텔로 공원과 시내 곳곳에 흩어진 한국, 영국, 일본 등 20여개 국가관들은 문을 닫거나 일정 시간 전시품들을 철수시키는 ‘전시 파업’으로 연대했다.
세계 현대미술의 영원한 수도로 꼽히는 베네치아가 지금 미술 저항의 도시로 변모했다. 전범 국가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국가관 전시 재개에 항의하는 세계 각지 작가와 기획자, 노동자의 연대 파업 시위가 벌어지면서 정치적·지정학적 이슈가 비엔날레 전시를 압도하는 초유의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앞서 6일부터 전문가·언론에 공개된 비엔날레 국가관 전시에 러시아와 이스라엘 정부의 국가관이 비엔날레 재단 쪽 허락 아래 출품되자 분위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미술인이 두 나라 국가관 앞에서 연막탄을 터뜨리거나 팔레스타인 연대를 표시하는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고, 주요 국가관들의 전시 기획자와 작가들은 두 나라와 재단을 규탄하는 집단행동 참가에 대해 내부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실로 이날 베네치아 시내에서 동시다발로 파업과 시위가 펼쳐진 것이다.
파업 시위는 국제 반전 작가 단체인 ‘예술은 학살이 아니다’ 연대(ANGA)가 가자지구 전쟁 피해자인 팔레스타인 연대를 위한 활동가 단체, 현지 예술노동자 조합 등과 수개월간 조직한 결과물이다. 가해국들이 예술을 면피 삼아 학살 책임을 씻어내려는 의도를 꼬집은 ‘아트 왁싱’이란 신조어까지 나온 시위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상당수 국가관과 본전시 작가들의 동참이었다. 한국관과 일본관, 네덜란드관, 벨기에관 등 카스텔로 공원의 상당수 국가관과 아르세날레의 본전시장에 연대 파업에 의해 문을 닫는다는 공고와 함께 팔레스타인 연대 메시지를 담은 포스터가 일제히 붙었고, 일부 작가들은 자기 작품에 팔레스타인 국기를 추가하기도 했다. 한국관의 경우 ‘팔레스타인은 세계의 미래다’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세계의 파괴라는 것을 알기에 팔레스타인과 함께 연대한다’는 두종의 영문 글귀를 폐쇄된 정문에 붙여놓았다.
전례가 드문 미술가들의 적극적인 연대 운동이 출현한 건 재단의 행보에서 비롯됐다. 우파 언론인·작가 출신으로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측근인 피에트란젤로 부타푸오코 비엔날레 재단 이사장이 “비엔날레는 어떤 배제·검열도 없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며 배제를 내세우는 것부터가 자기중심적”이라고 강변하며 2022년과 2024년 전시를 철회했던 러시아·이스라엘의 출품 신청을 지난 3월 전격 수용하고 지원한 것이 미술인들의 분노를 불렀기 때문이다. 곧장 유럽연합(EU)은 지원금 중단을 경고했고, 개막 직전 심사위원단은 러시아와 이스라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베냐민 네타냐후를 겨냥해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한 인물이 이끄는 국가에는 상을 주지 않겠다고 밝힌 뒤 전원 사퇴했다. 통상 개막식에서 치러온 시상식은 폐막일인 11월22일로 연기됐다. 황금사자상 대신 관객 투표로 국가관과 작가를 뽑는 ‘관객 사자상’을 주기로 했다. 임기응변식의 대체 시상을 두고 개막 직후 오토봉 응캉가, 로리 앤더슨 등 참여 작가 50여명이 수상 후보를 거부한다고 선언했고, 동조하는 작가들도 속출해 관객 투표의 기반도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집단행동 전례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68년 행사에서 소장 미술인들이 비엔날레 개혁을 요구하며 전시관을 점거해 시상식이 취소됐고,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시상제 없이 진행한 바 있다. 이번 건은 참여한 작가와 기획자들이 주최 쪽인 재단과 참여 국가를 겨냥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체제 홍보와 치적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쓰일 수 있는 현행 국가관 제도에 대한 혁파론이 확산되고 있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번 비엔날레는 총감독 유고 상태로 치르는 첫 사례여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재단 쪽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차이츠미술관의 총괄 디렉터 코요 쿠오를 예술감독으로 선정했으나, 지난해 암으로 별세했다. 이에 다른 협력 기획자들이 ‘마이너 키’(음악의 단조)로 전시 주제를 명명한 고인의 구상을 복기하며 전시를 만드는 틀거지를 띠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러시아 국가관 논란이 확산되자 비엔날레는 지구촌의 갈등을 축약한 무대로 변했다. 단조같이 섬세한 감각의 결과 내면의 울림을 중시하며 세상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들을 조명하려 한 쿠오 감독의 구상과는 부합하지 않는 여건이 조성된 셈이다.
실제로 카스텔로 공원 국가관들 풍경은 세계의 지정학적 지형도를 축소한 듯하다. 러시아관 앞은 사전 개방 당시 주변 시위에도 아랑곳없이 요란한 테크노 음악을 틀어놓고 파티 얼개의 사운드 전시를 지속했다. 공식 개막 뒤 내부는 닫고 외벽에 영상만 투사하고 있지만, 항상 군경이 지켜야 하는 상황이다. 인근 다른 국가관들도 러시아관에 비판적 시선을 겨눈 조형물들을 제작해 화제가 됐다. 서쪽 국가관 공원 들머리에 우크라이나 작가들이 전쟁터 포크로우스크에서 만든 사슴 오리가미(종이자르기 공작물)를 재현한 조형물을 올려 러시아관을 향하게 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설치한 작가들은 이 작품의 제작, 운송, 설치 과정의 여러 곡절 어린 작업 과정을 다큐 영상에 담아 아르세날레의 우크라이나관에서 전시 중이다. 러시아관을 마주보는 노르딕관도 벤자민 오로란 조각가가 한 청년의 두상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건물 밖에 배치했는데, 쏘아보는 눈동자 끝에 날카로운 목침 두개가 각각 박힌 채 시선을 러시아관 쪽으로 돌린 작업이어서 러시아관 전시 재개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암시하고 있다. 러시아관 바로 옆에 있는, 미국이 대통령을 범법자로 몰아 잡아간 베네수엘라의 국가관은 국정 공백 상태임을 반영하듯 ‘우리는 다시 태어날 것’이란 공고문만 붙인 채 아예 문을 닫은 모습이다.
이런 정치적 소음과 달리 올해 국가관, 본전시에는 울림이 깊고 풍부한 화제작들이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쿠오 감독이 제시한 낮은 울림에 맞춘 신선한 수작들이 곳곳에 나왔다. 비엔날레 운영 방식과 국가관 체제에 근원적인 비판이 분출하지만, 작품 선정이나 큐레이션 등은 기존 전시들과 차별성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단연 주목받은 국가관은 베네치아역 근처 카르멜 수도원에서 펼쳐진 바티칸(교황청)관의 전시였다. 금단의 수도원 정원을 거닐며 힐데가르트의 음악을 모티브로 현재 유명 음악가들이 만든 내면의 소리를 특정 지점마다 결을 달리해 듣게 했다. 스타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관여한 기획틀 자체가 화제를 모은다. 알몸의 배우가 매달린 종의 추가 되어 종을 울리거나 관객들이 배설한 소변을 정화한 수조 속에 들어가 관객을 바라보는 등의 퍼포먼스로 기후변화 시대의 환경 상황을 절규하는 오스트리아관, 수십개의 아기 인형들을 전시장 곳곳에 놓고 관객들이 안고 다니게 하면서 출산과 양육을 성찰하는 일본관도 눈길을 끌었다.
개별 작품으로는 본전시 들머리와 오스트레일리아관에 함께 출품하면서 비엔날레 대표 작가로 떠오른 레바논 출신의 이민 작가 칼레드 사브사비의 영성 가득한 멀티미디어 아트가 입에 오르내렸다. 이슬람 수피즘의 명상에서 기원한 푸르죽죽한 화면이 경전이 인쇄된 외벽들과 어울린 작업들은 쿠오 감독의 구상을 단적으로 압축한 대표작으로 꼽혔다. 헤즈볼라 지도자의 발언을 과거 작품에 담았다는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관 작가 선정이 취소됐다가 복귀한 이력도 눈길을 모았다. 어디서나 눈치 보거나 불편한 시선을 감내하는 유색인들의 일상을 표현한 영국관의 출품 작가 루바이나 히미드의 회화와 본전시에서 스펙터클하게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을 10m 넘는 걸개 화폭에 담은 케냐 출신 작가 칼로키 냐마이의 대작, 거울 조각을 단 밧줄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무속 양상을 표현한 카데르 아티아의 설치 작품, 제주섬 해녀의 숨결을 아이들의 숨결 소리로 들려주면서 오케스트라 작법으로 구성하고 영상으로 보여준 요이 작가의 작업도 아련한 잔상으로 남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관 전시가 예정됐으나 이스라엘 공습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시인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분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남아공 정부가 국가관 전시를 취소해 전시 기회를 박탈당한 가브리엘 골리앗은 아르세날레 인근 교회에서 지난 10여년간 다기한 폭력으로 희생당한 여성들을 퍼포먼서들의 구음 영상으로 불러내고 애도하는 ‘엘레지’를 선보였다.
비엔날레 시기에 맞춰 시내 곳곳의 특설 전시장에서 열린 대가들의 기획전들 가운데선 비엔날레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세상을 떠난 독일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가 지난해 치매와 싸우면서 내놓은 황금 화폭 작업들이 감동을 안겨주었다. 특유의 거꾸로 선 인간 군상 구도를 지속하되 지극히 섬약하면서도 거친 선으로 자신과 아내의 알몸을 표현한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생명의 기운을 소진하고 사위어가는 인간 육체의 실상을 웅변하듯 보여주었다. 베네치아 미술의 명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틴토레토, 베로네제 같은 거장의 작품들 앞에 수정석 신발이나 투사경을 놓고 자기 내면을 보게 한 행위예술 거장 아브라모비치의 회고전과, 나폴레옹이 명화를 약탈해간 산조르조마조레성당의 제대 앞에 동아시아풍 석가상과 아미타불상을 처음 놓으며 성스러운 파격을 꾀한 미국의 조각 대가 배리 엑스 볼의 근작 전시도 빠질 수 없는 관람 코스로 거론된다.
전시는 다채롭고 풍성하지만, 우파 이사들이 장악한 재단의 고집으로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국가관 전시 재개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심사위원단 사임과 사상 초유의 파업 시위, 시상제 대체 등으로 미술제의 권위는 크게 깎인 상황에서 전시는 앞으로도 약 6달간 계속된다. 러시아와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작가들은 앞으로도 행사 기간 지속적인 항의 행동과 기습 시위 등을 벌일 것이 빤하다. 베네치아는 1950년대와 1970년대 매너리즘에 따른 위기 상황에서 기획자 혹은 행정가의 절묘한 전시 혁신책으로 국가관제와 황금사자상 시상제를 유지시키면서 세계 최고 미술제의 권위를 공고하게 다져왔다. 과거 여느때와 달리 이번에는 비엔날레의 참여 주체인 작가와 기획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주최 쪽에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각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해법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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