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시대에도 山寺는 지식인들의 배움터였다 [조선생활실록(實LOG) ⑩]
2026.05.12 09:53
산속 사찰인 산사는 조선 불교 신앙과 의례의 중심이자 승려들의 수행 공간이었다. 그 숫자가 1500개 이상에 달했다. 조선 불교계는 선과 교학 전통을 함께 이어가야 했는데, 17세기에 체계를 갖춘 승려 교육과정은 10년 정도 선과 교를 배우고 화두를 들고서 의심을 깨치는 간화선과 화엄학이 핵심이었다. 금산사,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등에서 열린 화엄대회에는 1,000명이 넘는 대중이 모여 성황을 이루며 산사가 지식 공유의 거점임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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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에서 절 마당의 관등을 찍은 흑백사진으로, 사진 뒷면에 ‘安城 사월초파일놀이’라고 쓰여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유일(有一) 선사는 유교 사회에 부합하는 왕생 기준을 제시해 종교 간 윤리적 접점을 모색했다. 『염불보권문』에는 극락왕생 이야기가 실렸고, 『예념왕생문』 등 의식집은 1,000부씩 찍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신앙에 대한 높은 사회적 수요를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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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랑반혼전은 조선시대 불교 소설로, 불교를 비방하던 사람이 지옥에 떨어졌으나 염불을 정성껏 함으로써 오히려 환생하여 극락왕생한다는 내용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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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중이 쓴 구운몽의 19세기 필사본으로, 성진의 불교적 삶과 양소유의 유가적 삶을 모두 긍정하는 내용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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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에서 관등 행사를 찍은 흑백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산사는 유학자들의 배움의 터전이기도 했다. 세종 때 신숙주, 성삼문 등이 행한 사가독서는 산사가 국가적 인재 양성을 지원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편찬에 참여한 서거정도 “여러 산사에서 글을 읽었는데 다닌 곳마다 자연이 뛰어나 시를 짓고 기록을 남겼다”라고 회고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온 강항은 불갑사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지역 지식 교류의 거점이었다고 평하였다.
사대부나 유생이 명산을 답사하고 산사에서 승려와 교류하는 일은 흔한 광경이었다.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은 1688년 팔공산 은해사를 거쳐 운부사에 가서 꿀물과 곶감을 대접받고 학도 100여 명이 학승에게 『화엄경』을 배우는 장면을 직접 보기도 했다. 홍만종도 속리사 승려들의 모습에서 삼대의 위의를 떠올리며 불교 의례의 엄숙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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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조선의 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린 예불 장면. 그림 상단에 ‘중이 부처께 예불하는 모양’이라고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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