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면 어때? 진달래밭 온통 내 것인데 [낭만야영]
2026.05.12 07:55
퇴근 후 SNS에서 실시간 진달래 개화율을 검색했다. 경남 창원 천주산이 절정이었다. 돌풍을 동반한 폭우 소식도 있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비가 내리면 산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진달래로 뒤덮인 산을 독차지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창원으로 가는 열차는 이미 매진이었다. 하지만 문제없다. 빛의 속도로 클릭하면 반드시 좌석 하나는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배낭을 꾸렸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눈을 부릅뜨고 빈자리를 노렸다. 하나, 둘, 셋… 경쟁자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클릭하면 가차 없이 실패했다. 넷, 다섯! 드디어 잡았다. 사냥에 성공한 포식자마냥 혼자 신났다. 준비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창원은 날씨가 푸근했다. 하늘이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전세캠(사람 수가 적어 전세 낸 것처럼 캠핑을 즐기는 것)'은 장담할 수 없다. 일단 근처 치킨집에 들러 양념 반 마리를 주문했다. 제발 비만 내려주길 바랐다. 치킨을 배낭에 얹고 천주산까지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등산객이 있다면 해가 지고 난 뒤에 텐트를 칠 수 있을 것이다.
등산로 입구인 천주암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자 등산객이 하나 둘 내려오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전에 하산을 서두르는 듯 걸음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달래 군락지에 들어서자 더 이상 등산객은 없었다.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MBTI 'P즉흥형'의 진가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J계획형' 친구들이 알면 온갖 잔소리를 퍼부을까봐 비밀리에 진행된 백패킹은 성공이었다.
진달래 사잇길로 걸어 들어갔다. 빗물을 머금은 진흙이 발에 달라붙었다. 평소라면 무거워진 발걸음에 짜증이 났겠지만, 진흙을 발사하듯 신나게 발을 튕겼다. 반동으로 되돌아와 정강이에 달라붙는 진흙덩어리마저 좋았다. 양옆으로 만개한 진달래 꽃잎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에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오냐~" 여기저기 인사를 받아 주느라 나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천주산 전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했다.
가장 '핫플'인 데크에 도착했다. 비는 서서히 힘을 잃었다. 저 아래 진달래 밭 끄트머리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진달래 군락을 부드럽게 감싸 안듯 서서히 올라왔다. 눈앞에 펼쳐졌던 분홍 꽃들이 모두 사라졌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바람이 불어왔다. 안개 속에서 다시 분홍빛이 짙어졌다. 바람에 일렁이는 안개는 진달래 밭 위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얇은 천 사이에 두고 바람과 맞대결
더 이상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텐트를 쳤다. 이 황홀한 풍경을 두고 와인 한 잔도 없이 양념치킨을 뜯는 게 참으로 섭섭했다. 즉흥적인 뇌를 가진 몸뚱아리의 업보라고 치자.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음식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을 때는 사장님이 챙겨준 콜라를 마다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치킨에 생수는 예의가 아니다. 역시 '치콜', '치맥'은 진리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조촐한 식사가 끝나고 나니 딱히 할 게 없다. 배낭 속에는 침낭과 드론뿐이었다. 발포매트 위에 누워 드론을 날렸다. 조종기 모니터에는 핑크색 진달래 밭 한가운데에 놓인 파란 텐트와 누워 있는 내가 보였다. 시간이 멈춘 듯 스틸 사진 같은 모니터에 이따금씩 안개 한 무리가 동네 건달들 마냥 기웃거리다 사라졌다.
숨을 고르듯 고요했던 공기가 조금씩 일렁이나 싶더니, 진달래가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완연한 어둠이 내리자 바람이 거세졌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굵어진 안개방울이 바람을 타고 부딪치는 것이었다. 안개 건달무리가 또 우르르 몰려다니며 나의 자유를 훼방 놓고 있는 것이다. 멀리에서 다가오는 회오리바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텐트를 세차게 두드리고는 멀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강도는 심해지고, 간격도 짧아졌다.
데크 위 발소리에 잠이 깼다. 텐트 밖은 고요했다. 워낙 난리통에 잠이 들어 그런지 고요함은 오히려 꿈속 같았다. 텐트 문을 열자 일출 사진을 찍으러 올라온 어르신이 서 있었다. 새벽 5시였다.
"안녕하세요. 일찍 올라오셨네요?"
"아이구, 어제 비가 많이 왔을 텐데, 혼자 잤어요?"
어르신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제 익숙해서 괜찮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없어서 천주산 독점하고 좋았어요."
"그렇지. 나도 사람이 없을 때가 제일 좋아. 피사체에 집중하기가 좋거든."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며 말했다.
나도 짐을 정리했다. 비가 그친 천주산은 쌀쌀했다. 배낭을 싸놓고 텐트 문을 열어둔 채 일출을 기다렸다. 하나 둘 사람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추운데 텐트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요즘은 자칫 쓸데없는 오지랖이라 치부될 수 있어서 밖으로 나가 분위기를 살폈다. 얼굴을 얇은 재킷에 묻은 채 구석 난간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릴래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람이 점점 늘었다. 쓸데없이 베풀려는 친절에, 해가 뜨는데 텐트도 안 접는 개념 없는 백패커가 될 것 같아서 재빨리 텐트를 접어 넣었다. 어르신이 자리 잡았던 위치는 일출 사진 명당이었다. 여명이 밝아오자 몰려드는 사람들에 결국 어르신은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인증 사진을 담기 위한 등산객들의 행렬은 계단까지 장사진을 이뤘다. 평일 새벽부터 올라오는 그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구름 위로 해가 떴다. 차디찬 공기에 경직되었던 진달래 능선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진달래에 빛이 반사되면서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비와 바람, 그 거칠었던 시간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차례로 난간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으로 그 자리에 있지만 그들은 진달래를, 나는 즐거워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내 인생에 언제나 쓴소리만 하는 친구 정미에게 전화가 왔다.
"나 어제 베어 그릴스 빙의 됐었어!"라며 모험담을 늘어놓자 정미가 말했다.
"또 혼자 산에 갔어? 혼자 좀 다니지 말라고, 이 민 곰탱이야!"
또 한 번 잔소리는 들었지만 어쨌든 베어 그릴스로 인정해 준 것이다. 정미의 잔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배낭을 메고 진달래 밭을 가로질러 하산했다.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천주산(640m)
경남 창원시 의창구·마산회원구, 함안군 칠원읍
산행 거리 5.3km 산행 시간 2시간 30분 산행 난이도 ★★☆☆☆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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