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완전히 무고하지 않다… 메트 뒤흔든 오페라 '이노센스'
2026.05.12 04:31
카이야 사리아호가 남긴 비극과 치유
갈등과 분열이 일상이 된 시대, 예술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유의미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그중에서도 오페라는 화려한 의상과 오래된 서사 속에 갇힌, 현실과 동떨어진 장르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난달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 무대에 오른 현대 오페라 한 편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시대일수록 예술의 힘이 절실함을 보여줬다. 핀란드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1952~2023)의 유작 '이노센스(Innocence)'다.
2021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노센스'는 핀란드 헬싱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영국 런던 등 세계 주요 극장 무대에 오르며 '완전히 전율적'(뉴욕타임스), '현대의 걸작'(텔레그래프) 등의 찬사를 들었다. 북미에서는 2024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이어 메트에서 이번에 초연됐다.
작품의 시작은 평범한 결혼식장이다. 핀란드 헬싱키의 한 레스토랑, 신랑 투오마스와 신부 스텔라의 결혼 피로연이 열리는 동안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감돈다. 신랑의 가족은 10년 전 국제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의 기억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고, 우연히 이 축하연에 고용된 웨이트리스 테레자는 바로 그 사건으로 딸 마르케타를 잃은 유족이다.
한국에서도 연극 '벚꽃동산'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호주 연출가 사이먼 스톤은 회전하는 2층 건물을 세워 두 개의 시간대를 끊임없이 교차시킨다. 회전 무대가 움직일 때마다 레스토랑은 총격 사건 현장이었던 교실과 학교 식당, 화장실 등으로 바뀐다. 극이 진행될수록 가족이 숨겨 온 비밀과 균열도 서서히 드러난다.
무죄·결백을 의미하는 '이노센스'라는 제목과 달리 극 중 완전히 무고한 사람은 없다. 어른들은 아이의 위험 신호를 무시했고, 총기 사건의 피해 학생들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다. 총기 사건 가해자의 부모는 가족의 삶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묻어버렸다. 작품은 총격범 개인보다 그런 비극을 가능하게 한 사회 전체의 침묵과 책임에 주목한다.
전통적인 벨칸토 창법부터 핀란드 민속 음악, 말하는 듯한 '슈프레히게장(Sprechgesang)'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된 음악은 불안과 긴장을 끊임없이 증폭시킨다. 9개 국어가 혼용된 대본에 맞춰 사리아호는 언어별 특징을 악보에 녹여냈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구조는 연결과 소외를 오가는 현대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극 중 비극이 특정 지역이 아닌 전 세계적 현상임을 뜻하는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무대 위 감정의 밀도는 성악가들의 압도적인 연기로 완성됐다. 테레자 역의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는 딸을 잃은 고통을 온몸으로 토해내며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한국인 소프라노 캐슬린 킴의 활약도 돋보였다. 가해자의 어머니 패트리샤 역을 맡아 아들을 감싸려는 본능과 자책 사이에서 무너지는 복합적인 감정을 예리한 고음과 섬세한 연기로 소화해냈다.
'이노센스'는 외면해 온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묻는다. 대본을 쓴 작가 소피 옥사넨은 피터 겔브 메트 총감독과의 대담에서 "예술이 정의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며 "피해자들에게 공간과 목소리, 서사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정의"라고 말했다. "매일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는 끔찍한 세상에서 학교 총격은 물론 전쟁 범죄, 성폭력,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정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스톤 역시 한 인터뷰에서 "엄청난 정치적 소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아래 존재하는 순수함의 목소리를 불러내는 것"이라며 "그것이야말로 오페라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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