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이 아내에게 준 5천 원의 용도
2026.05.11 14:21
| ▲ 장모님이 건넨 5천 원 박서방에게 생태탕 끓여주라며 건넨 5천 원에는 장모님의 한없는 사위 사랑이 접혀 있었다. |
| ⓒ 박동환 |
지난 어린이날이었다. 세상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들썩였지만, 강릉 주문진 처가 거실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아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두었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5천 원권 한 장이었다.
"엄마가 박 서방 생태 사서 끓여주래. 어른 노릇은 해야 한다면서."
장모님이 아내에게 건넨 5천 원 지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로 세로로 여러 번 접힌 자국이 선명했다. 10여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뒤, 장모님의 세상은 침대 하나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장모님은 이 지폐를 몇 번이나 접었다 폈을까. 깊게 팬 접힌 자국마다 노모가 홀로 견뎌온 고단한 시간의 무늬가 훈장처럼 박혀 있는 듯했다.
올해 여든일곱. 장인어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온 억척스러운 세월이었다. 그 끝에 찾아온 병은 이제 장모님의 기억마저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한 달에 한두 번 찾아 뵙는 것으로 사위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 손바닥 위에 놓인 가벼운 지폐 한 장은 이상하리만큼 무거워 보였다. 그건 돈의 무게가 아니었다. 장모님에게 5천 원은 아마 당신이 가진 세상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맑았던 시절의 장모님은 손이 참 크셨다. 사위가 온다 하면 시장을 통째로 옮겨올 듯 생태며 홍게며 좋은 것만 골라 한 상 가득 내놓으시던 분이었다. 이제는 5천 원과 5만 원조차 구분하기 힘든 처지가 되셨지만, 사위에게 직접 생태탕을 끓여 먹이고 싶어 하던 그 본능적인 마음만큼은 '0' 하나가 빠진 지폐 뒤에 숨어 여전히 꼿꼿하게 살아있었다.
비록 당신의 육신은 병상에 묶여 있을지언정, 마음만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젓고 계셨던 것이다.
"이왕 주실 거 오천 원 두 장 주시지 그랬어. 그럼 난 십만 원 받은 셈 칠 텐데."
괜히 코끝이 찡해져 짓궂은 농담을 던졌지만 아내는 웃지 못했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질수록 사랑도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남게 된다는 걸 아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 생태탕 대신 동태탕 생태는 이제 귀한 대접을 받는 어물이어서 동태탕으로 대신하였지만 그 안에 감춰진 장모님의 사랑은 그대로였다. |
| ⓒ 박동환 |
그날 우리 집 식탁에는 생태 대신 동태탕이 올랐다. 요즘은 좀처럼 생태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먹은 국물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시원한 국물 맛 뒤로 자꾸만 목이 메었다. 꼬깃하게 접힌 지폐 한 장 속에는 병보다 오래 살아남은 마음, 지독한 치매조차 범접하지 못한 노모의 투명한 진심이 녹아 있었다.
나는 그날, 사랑이 반드시 온전하고 화려한 모습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때로는 낡고 꼬깃꼬깃한 5천 원권 지폐 한 장이 5만 배의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장모님, 모쪼록 건강하세요. 그리고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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