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국산 HVDC로 서해안 잇는다"…효성의 '전력망 야심'
2026.05.11 11:00
HVDC 국산화 승부수…'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정조준
스테콤 넘어 HVDC까지…효성, 15년 축적한 DC 기술력
초고압 변압기 슈퍼사이클…'황제주' 오른 효성중공업
AI 전쟁 마지막 승부처 '전력망'
1977년 준공된 효성중공업 창원공장은 국내 전력기기 산업의 '마더플랜트'로 불린다. 22만평 규모 부지에서 약 3000명의 직원이 초고압변압기·차단기·가스절연개폐장치(GIS)·스테콤(STATCOM·정지형 무효전력 보상장치)·HVDC(초고압직류송전)·ESS·전동기 등을 생산한다. 국내 최초 154kV 초고압변압기와 765kV 초고압변압기, 800kV급 GIS를 개발한 곳도 이 공장이다. 현재 창원공장은 초고압변압기와 차단기 모두 누적 생산액 10조원을 돌파한 국내 유일 생산기지로 성장했다. 연간 생산 규모만 약 2조원에 이른다.
최근 창원공장의 의미는 단순 전력기기 공장을 넘어서고 있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미국 곳곳에 데이터센터가 들어서고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까지 겹치면서 국가 전력 인프라의 핵심 생산기지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은 이미 슈퍼사이클에 진입했다. 전기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멀리, 빠르게 보내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문제는 전력망이다. AI 데이터센터·반도체 공장·재생에너지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기존 교류(AC) 중심 송전망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해지고 있다. 태양광·풍력처럼 출력 변동성이 큰 전원이 늘어날수록 계통 안정성 확보도 어려워진다.
이 과정서 핵심 기술로 떠오른 것이 HVDC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교류 전력을 직류(DC)로 바꿔 장거리 송전한 뒤 다시 교류로 변환해 공급하는 방식이다. 기존 교류 송전보다 전력 손실이 적고 대용량·장거리 송전에 유리하다. 지역 간 계통 충돌이나 고장 확산을 막는 '전력망 방화벽' 역할도 가능하다.
효성중공업은 이 HVDC를 미래 전력망의 핵심 사업으로 보고 일찌감치 국산화에 뛰어들었다. 지난 2012년부터 자체적으로 DC 기술 개발에 착수했고 국가 과제를 수행하며 기술력을 축적해왔다. 첫 출발점은 제주 행원단지였다. 효성중공업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20MW급 DC 기술을 개발하며 MMC(모듈형 멀티레벨 컨버터) 기반 기술을 확보했다.
* 스테콤과 HVDC 두 기술은 기반 구조는 비슷하지만 쓰임새가 다르다. 스테콤은 송전망 주변에서 전압 변동을 제어하고 계통을 안정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면 HVDC는 전력망에 직접 연결돼 대용량 전력을 장거리로 보내는 시스템이다. 스테콤이 무효전력을 보상해 전압 수준을 유지하는 기술이라면, HVDC는 이를 바탕으로 실제 전력을 대규모로 송전하는 한층 복잡한 설비에 가깝다.
창원공장 내 스테콤·HVDC 컨버터 공정은 반도체 공장 같은 완전 자동화 라인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작업자들은 부품이 담긴 키트 대차를 직접 끌고 다니며 파워모듈을 조립하고 있었다. 품질 추적성을 높이기 위해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맡는 구조다. 파워모듈과 커패시터가 결합되면 서브모듈이 되고, 서브모듈 6개가 표준형 밸브를 이룬다. 고객 사양에 따라 4개에서 7개까지 조정된다.
조립을 마친 모듈은 전압 센서 동작 확인과 실전압 시험을 거친다. 이후 밸브 단위로 수압 시험·절연 부분방전 시험·기능 시험 등을 통과해야 출하된다. 결선 작업은 지금도 상당 부분 사람 손을 거친다. 현장 관계자는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연결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 자동화가 쉽지 않다"며 "다만 최근 물량이 빠르게 늘고 있어 파워모듈 조립 단계부터 자동화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HVDC 독립 선언한 효성…"기술 종속 없다"
특히 효성중공업이 주력하는 분야는 전압형 HVDC다. 기존 전류형 HVDC는 기술 성숙도가 높지만 무효전력 보상을 위해 별도 스테콤 설비가 필요하다. 반면 전압형 HVDC는 자체적으로 계통 안정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 재생에너지 연계에 더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양주변전소에서는 국내 최초 국산 전압형 BTB(Back-To-Back) HVDC 시스템이 실제 상업 운전 중이다. 200MW급 설비다. 단순 부품 공급 수준이 아니라 설계·제작·시험·운전까지 모두 국산 기술로 구현한 첫 사례로 꼽힌다. 중국을 제외하면 글로벌 네 번째 수준의 전압형 HVDC 자체 기술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효성중공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GW급 대용량 전압형 HVDC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목표는 정부가 추진 중인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1단계 사업이다. 새만금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2GW급 설비 4기가 들어가는 총 8GW 규모 프로젝트다.
2GW 개발 역시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처음부터 만드는 방식은 아니다. 양주 200MW 사업에서 확보한 제어 시스템과 밸브 기술을 기가와트급으로 확장하는 구조다. 장 공장장은 "양주 프로젝트 당시 제어 시스템 자체를 이미 1GW급까지 대응 가능하도록 설계해 둔 상태여서 검증된 시스템을 병렬로 확장하고 이를 통합 제어하는 상위 기술 개발이 핵심"이라고 부연했다.
효성중공업이 자체 HVDC 기술 개발에 매달리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현재 HVDC 시장은 히타치·GE·지멘스 등 글로벌 3강 체제가 주도하고 있다. 국내 일부 기업이 이들 기업과 기술 협력을 통해 시장 진입을 추진하는 것과 달리, 효성중공업은 독자 기술 확보에 무게를 싣고 있다.
기술 자립 없이는 해외 시장 진출은 물론 국내 전력망 안정화에도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해외 기술 기반 개발은 특허와 기술 사용료 부담이 뒤따르고 유지보수 역시 외국 기술사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 중국 역시 HVDC 분야에서 아직 해외 기술 로열티 문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창원공장도 HVDC 중심으로 빠르게 몸집을 키우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창원공장 내 약 9000평 규모 부지에 국내 최대 규모 전압형 HVDC 변압기 전용공장을 짓고 있다. 총 투자 규모는 3300억원이다. 2027년 완공, 2028년 본격 가동이 목표다. 새 공장이 가동되면 창원공장 전체 변압기 생산능력은 약 20% 증가할 전망이다. 동시에 설계와 핵심 기자재 생산, 시험·검증을 아우르는 HVDC 통합 생산 거점으로 진화하게 된다.
상업적 성과가 본격화하는 시점은 2030년 전후가 될 전망이다.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준공 시점과 맞물려서다. 회사는 해외 시장 진출도 병행 추진 중이다. 장 공장장은 "어려운 길이지만 자체 개발을 택했고 2027년 말까지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에 들어갈 전압형 HVDC 변압기 개발을 마무리할 것"이라며 "HVDC를 변압기 단품 사업이 아니라 전체 DC 시스템 사업의 한 축으로 키워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HVDC가 창원공장의 미래 성장축이라면, 지금 효성중공업 실적과 주가를 가장 강하게 끌어올리는 것은 초고압 변압기다. 효성중공업은 미국 765kV급 초고압 변압기 시장 강자로 꼽힌다. 올해도 약 7800억원 규모 초대형 전력기기 공급 계약을 따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노르웨이·독일 등 유럽 시장에서도 입지를 빠르게 넓히고 있다.
초고압 변압기는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장거리로 보내기 위해 전압을 높이고 다시 낮추는 핵심 장비다. 효성중공업은 154kV급 이상을 초고압 변압기로 분류한다. 창원공장의 주력 제품 역시 미국과 유럽 전력망에 들어가는 대형 초고압 변압기다.
이 산업은 자동차처럼 규격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고객마다 요구하는 전압·손실률·설치 환경·안전 기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변압기처럼 보여도 사실상 주문마다 새로 설계하는 '맞춤형 장비'에 가깝다.
생산 공정 역시 수작업 비중이 높다. 규소강판을 잘라 철심을 만들고 여기에 구리선을 감아 권선을 조립한다. 작업자들은 철심을 한 장씩 쌓고 절연 구조물을 일일이 조립하고 있었다. 상당수 공정은 지금도 숙련공 경험에 의존한다.
설계와 생산이 한 공간에서 움직이는 점도 창원공장의 경쟁력으로 꼽힌다. 약 100명의 설계자가 전기·권선·본체·탱크 설계를 맡아 주문별 제품을 설계,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현장 대응에 나선다.
시장 분위기는 이미 '슈퍼사이클'에 들어섰다. 장 공장장은 "과거 5~10주면 받던 일부 부품 납기가 지금은 100주 수준까지 늘어났다"고 말했다. 효성중공업뿐 아니라 글로벌 주요 업체들까지 생산능력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과거 업황 둔화기에는 생산능력 축소까지 고민했지만 지금은 생산 인력은 물론 설계·연구 인력 채용까지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유럽 시장 확대도 공장 분위기를 바꿔놓고 있다. 과거 주력 시장이 미국·중동·동남아였다면 최근에는 유럽 물량이 눈에 띄게 커졌다. 유럽은 규격과 고객 요구 수준이 훨씬 까다로운 시장이다. 장 공장장은 "설계자들이 미국 변압기 3대보다 유럽 변압기 1대가 더 어렵다고 말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미국 시장에서 레퍼런스를 쌓으며 경쟁력을 키웠듯 이제는 유럽 시장을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기술력을 요구받고 있다는 의미다.
효성중공업은 초고압 변압기뿐 아니라 HVDC 변압기와 위상조정변압기(PST) 같은 고난도 제품으로 후발 업체와의 격차를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시장 기대감은 주가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효성중공업 주가는 최근 400만원을 돌파하며 국내 증시 대표 '황제주'로 올라섰다. AI 시대 대표 전력 인프라 수혜주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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