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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주거환경 따졌다…TSMC '유럽 1호 공장', 독일을 선택한 이유

2026.05.11 06:30

[산업전환 돌파구, 독일에서 찾다]<1>반도체 특구 성공법 (上)
[편집자주] 인공지능(AI) 전환(AX)·녹색 전환(GX)으로 요약되는 산업 변환기이자 '경제안보'로 대표되는 지경학적 전략이 주목받는 시대다. 전통 제조업 강국인 독일은 어떻게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들여다봤다.
살고 싶은 곳 만들자 '17조' 투자 왔다…TSMC, 독일 찍은 이유

①학교·보육..정주 여건을 잡아라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부근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ESMC 건설현장/사진=권다희 기자
독일 남동부 작센주 주도(州都) 드레스덴 인근 아우토반 13호선(A13)을 달리다 드레스덴 공항 인근에 이르자 지평선을 메운 거대한 기중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은 대만 반도체 기업 TSMC가 인피니온·보쉬·NXP 등 유럽 반도체 기업들과 합작한 ESMC의 반도체 팹(fab·반도체 생산 공장) 건설 현장이다. ESMC는 이 곳에 100억 유로(약 17조 원)를 투입해 월 4만 장의 300mm(12인치) 웨이퍼 생산 능력을 갖춘 팹을 구축한다. 올해 공사를 마무리하고 내년 양산하는 게 목표다.


TSMC가 첫 유럽 진출지로 이 곳을 낙점한 데엔 유럽연합(EU)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이 마중물 역할을 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수많은 EU 내 입지 중 왜 독일이었고, 독일 중에서도 16개 주 중 하나인 작센이었는지를 살피는 과정은 한국에 시사점을 준다.

작센주 반도체 생태계(실리콘작센) 투자 및 확장 역사/그래픽=이지혜

◆ TSMC의 첫 유럽 공장…유치 핵심 '산업 클러스터'

지난달 21일 작센주 총리 집무청사에서 만난 토마스 호른 작센주 경제개발공사(WFS) 대표는 TSMC 유치의 핵심 요인을 묻자 "이미 형성된 클러스터"를 첫손에 꼽았다. 그는 "이곳에는 공급업체· 협력사·숙련된 인력이 이미 갖춰져 있다"며 "다른 지역을 선택하면 생태계를 처음부터 구축해야 하는 만큼 기업으로선 이 부분이 가장 매력적인 요인"이라 했다.

ESMC가 둥지를 튼 '실리콘 작센(Silicon Saxony)'은 유럽 최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반도체·센서·집적회로 등 초소형 전자부품 기술) 클러스터다. 전력·차량 반도체 등 유럽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칩 3개 중 1개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1960년대 동독 시절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연구 거점으로 기반을 닦았고, 독일 통일 후인 1994년·1995년 지멘스 반도체 부문(현 인피니온)과 AMD(현 글로벌파운드리)가 생산 거점을 세우며 입지가 굳건해졌다. 현재 인피니온·글로벌파운드리·보쉬 등 글로벌 기업들과 공급망 기업들을 포함한 약 3650개 기업, 연구소·대학들이 밀집해 있다. 관련 종사자는 8만1000여 명이다.

인위적·단기적으로 만든 특구가 아니라 오랜 시간 유기적으로 형성된 산업 생태계는 이 곳 기업들의 경쟁력을 배가시켰다. 각 기업과 기업·기업과 연구기관들이 교류하며 경쟁력을 높이는 선순환을 통해서다. 같은 날 인피니온 드레스덴 사업장에서 만난 우베 가블러 인피니온 드레스덴 독일 연구혁신 네트워크 총괄은 "연구개발 인재·대학과의 연결 측면에서 실리콘 작센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 했다.

캐롤라 다리 인근에서 바라본 독일 드레스덴 구시가지 전경. 엘베강 너머로 아우구스투스 다리와 드레스덴 대성당(카톨릭 궁정교회) 등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 펼쳐져 있다. 유럽 최대급 반도체 클러스터인 '실리콘 작센'이 차로 약 10여 분 거리에 자리해 있어, 첨단 산업과 문화·예술 도시의 면모가 공존하는 드레스덴의 정주 환경을 보여준다./사진= 권다희 기자

◆"결국 오는 건 사람…국제학교·주거환경 중요"

작센주는 오랜 투자유치 경험을 통해 해당 기업 구성원들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환경 구축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도 간파했다. 다비드 미헬 작센주 총리실 국제관계·개발협력 부서장은 "결국 오는 것은 사람"이라며 "이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작센주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는 기반시설을 강조한다. 여성들의 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보육과 교육 시스템에 투자해 온 배경이다. 단순히 공장 부지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전세계에서 온 인재들이 가족과 함께 뿌리 내릴 수 있는 기반을 주정부 차원에서 보장한다는 의미다. 문화적 기반·관광 자원도 정주 여건의 핵심 요소로 적극 활용한다. 가족·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세계적인 명소들이 지척에 있다는 게 비즈니스 관점에서 강력한 유인책이 된다는 관점에서다.

미헬 부서장은 "이 곳에 사는 이들이 음악·예술·박물관 등 문화적 요소들에 잘 연결될 수 있게 하고, 자녀들이 국제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주거 문제가 해결된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며 "우리가 말하는 생태계는 기업과 연구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생활환경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클러스터를 주재원과 그 가족들이 이직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로 보는 관점도 이런 시각을 드러낸다. 호른 대표는 "다른 나라로 이주를 결정할 때는 보통 현재 소속된 회사에 의존하게 되지만 그 곳에 영원히 머물지는 알 수 없다"며 "하지만 클러스터가 있는 드레스덴에서는 다른 기업, 연구소나 공급망 기업으로 이동할 기회가 있고, 이는 직원들 또는 그들의 가족이 다른 회사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매력적 요인을 더한다"고 했다.

엘베강 너머로 펼쳐진 독일 드레스덴 구시가지 스카이라인. 중앙의 성모교회(Frauenkirche)를 중심으로 바로크 양식 건축물들이 이어져 있다. 작센주 정부는 실리콘 작센 주요 기업들과 차로 10분 안팎 거리에 위치한 이 역사적 도심을 드레스덴의 핵심 정주 경쟁력 중 하나로 꼽는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와 문화·예술 인프라가 가까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점에서다./사진=권다희 기자
이 같은 작센주 정부의 접근은 한국이 지역균형 발전을 실현하는 데 현실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국내 기업들이 수도권 이외의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꺼리는 핵심 이유가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정주 여건의 미비라는 점에서다.

김승희 KEI컨설팅 매니저는 "국내 기업들이 지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기 어려운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 건 인력이 없다는 것"이라며 "우수한 인력을 유입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단순한 부지 지원을 넘어, 인재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정주 인프라 구축에 정부와 지자체가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작센주 주요 산업별 매출 비중, 작센주 연도별 수출 이정표/그래픽=이지혜


연방은 길잡이, 州는 디테일… 독일 투자 유치 이끄는 분업의 힘

②지방정부 '디테일'의 힘

ESMC 개요/그래픽=윤선정
독일 작센주의 TSMC 유치는 독일 특유 연방제가 구축한 '분업체계'의 결실로도 볼 수 있다. 연방정부가 입지 선정을 지원하고 주(州)정부는 실무를 도맡는 체계다.

◆연방은 입지 선정, 지방 정부는 기업 맞춤형 지원

외국 기업이 독일에 투자를 결심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연방정부 산하 독일 무역투자진흥청(GTAI)이다. GTAI의 저력은 독일 16개 연방주와 기업을 잇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데 있다. 기업의 요구사항을 분석해 후보지를 골라내는 과정을 GTAI가 맡는다.

GTAI를 통해 입지가 특정 주로 좁혀지는 순간, 본격적인 실무는 주정부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들은 지역의 산업 지형을 꿰뚫고 있는 전문가로서, 특정 지자체만이 제공할 수 있는 맞춤형 인센티브·인프라 지원·인적 자원 수급 방안 등 정책 패키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분업 시스템은 초기 의사결정 단계에서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각 주의 전문성이 결합하며 타국이 갖지 못한 '디테일' 발휘로 이어진다.

이는 각 주가 자신만의 산업 생태계를 발전시켜 온 데 따른 정밀함 덕분이다. 작센주가 드레스덴의 반도체 산업, 라이프치히·츠비카우 일대의 자동차 제조업이 결합한 제조 거점이라면,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메르세데스-벤츠·보쉬·SAP 등을 중심으로 자동차·기계·산업용 소프트웨어 산업을 발달시켜 왔다. 바이에른주는 BMW·아우디·지멘스 등을 축으로 첨단 제조업과 항공우주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고,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에서 인근 라인란트팔츠주 마인츠로 이어지는 지역은 머크 등 제약·생명공학 분야 기업과 연구기관이 밀집해 있다.
글로벌 기업들의 독일 투자 사례/그래픽=윤선정

◆입지 확정 후 가동되는 주정부의 '디테일'

독일로 유입되는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는 이 같은 체계가 꽤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의 누적 프로젝트 수 기준, 독일은 세계 3위의 투자 목적지다. 산업별로는 디지털화(21%), 전자·로보틱스(16%), 모빌리티·물류(14%)에 집중됐다. 투자 유입의 원천을 살펴보면 단일 국가로는 미국이 전체 FDI의 23%로 가장 크고, 네덜란드(9%), 영국(8%), 룩셈부르크(8%), 프랑스(4%) 등 유럽 국가들의 투자 비중도 상당하다.

지난달 20일 베를린 소재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 청사에서 만난 마르쿠스 빈케 GTAI 투자지원 서비스 본부장은 "독일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는 기업들은 처음에 독일의 환경이 다소 복잡하다고 느낄 수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국가 및 지역 수준에서 강력한 지원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GTAI)는 무엇보다 기업들이 독일 내에서 이상적인 위치를 찾는 것을 돕는다"며 "이후 지역 경제 전문가들이 제안된 프로젝트를 검토해 인센티브와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시스템은 독일에 대한 사업 투자를 이해하기 쉽고 투명한 과정으로 만든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전쟁' 참전 유럽, 투자유치 '협력적 경쟁'

③EU반도체법이 '현실 투자'가 되는 과정

EU 반도체법 개요/그래픽=윤선정
독일 작센주의 TSMC 투자 유치는 유럽연합(EU) 차원의 거대한 산업정책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 준다.

EU는 지난 2023년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고 아시아·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EU 반도체법(EU Chips Act)'을 발효했다. 이 법의 핵심 목표는 현재 10% 수준인 유럽의 글로벌 반도체 생산 비중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EU는 공공· 민간 투자를 포함해 약 430억 유로(약 74조 원) 규모의 지원·투자 패키지를 추진한다.

◆전략자산 된 반도체…유럽도 공급망 구축 속도

최근에는 'EU 반도체법 2.0'에 대한 논의도 본격됐다. 기존 법안이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 유치와 긴급 공급망 대응에 초점을 맞췄다면, 2.0은 양자 컴퓨팅용 차세대 칩과 AI 반도체 설계 등 기술 고도화에 방점을 찍는다. 보조금 경쟁에 따른 국가 간 불균형을 해소하고 유럽 전체를 유기적인 생태계로 묶는 '범유럽적 협력' 강화도 핵심이다.

EU 반도체법 발효는 팬데믹이 촉발한 공급망 혼란이 방아쇠가 됐지만, 그 이면에 기술 패권이 국가 안보로 연결되는 지정학적 변화가 있다. 미국이 자국 중심 반도체 생태계 재편을 위해 '반도체법(CHIPS Act)'을 한 발 일찍 시행하며 보조금 전쟁의 포문을 열었고, EU도 타 지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반도체 생산시설을 역내에 유치하기 위한 조치를 구체화했다.

유럽이 EU 반도체법을 통해 노리는 지점은 엔비디아식 AI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과의 정면 승부라기보다, 자신들이 강점을 가진 자동차·산업용·전력반도체 분야의 공급망 강화에 가깝다.

협회 '실리콘작센'의 프랑크 보젠베르크 대표 /사진=권다희 기자

◆"시장 파이 키워야…EU 내 협력적 경쟁"

EU 반도체법을 활용해 추진되는 투자도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분야에 집중됐다. 프랑스에서는 총 74억유로를 투입해 건설 중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글로벌파운드리의 합작 공장이 저전력·고효율 반도체 생산 거점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탈리아 역시 실리콘 카바이드(SiC) 기반 전력반도체 공급망 확대를 위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생산시설 구축에 20억유로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작센주 반도체 클러스터 기업·연구소들이 소속된 협회 '실리콘 작센' 사무실에서 지난달 21일 만난 이 협회의 프랑크 보젠베르크 대표는 "산업 유치를 두고 (EU 내) 다른 지역들과 경쟁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EU 내 반도체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게 공동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코피티션(Co-opetition·협력적 경쟁)이란 용어를 쓴다"고 했다.

이어 그는 "2030년 20%라는 목표는 한 지역만의 성장으로 결코 달성할 수 없다"며 "시장의 파이 자체가 긍정적으로 커지고 있는 만큼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우리와 같은 클러스터를 세우고 그들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도 이득이 된다"고 했다. 그는 남은 과제로 "관료주의를 개선하고 행정을 더 디지털화해 속도를 높이는 작업이 특히 생태계 허리인 중소기업을 위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드레스덴·베를린=권다희 기자 dawn2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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