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노조와 ‘한판’…주주권은 ‘절대선’일까[한국형 주주 자본주의 준비됐습니까]
2026.05.10 20:25
중복상장 저지·파업에 소송 등
상법 개정 이후 실력 행사 늘어
‘주주 권익 신장 vs 신산업 육성’
기업·국가 성장 담겼나 고민을
지난 6일 사상 최초로 7000선을 돌파한 코스피는 ‘8000피’도 넘보고 있다. 최근 반도체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주주 환원 내용을 담은 세 차례 개정된 상법 영향이 컸다. 그동안 지배주주 목소리에 묻혔던 소액주주들의 권익이 커진 셈이다.
최근 자본시장 곳곳에서는 소액주주의 ‘실력 행사’가 부쩍 눈에 띈다. 올해 들어서만 주주들은 단체행동을 통해 중복상장을 저지하고(LS그룹), 유상증자에 일단 제동을 걸었으며(한화솔루션), 성과급 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의 파업(삼성전자)에 맞불을 놓고 있다. 과거 ‘오너’ 중심이던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소액주주들도 목소리를 내면서 이해관계자 간 긴장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생경한 풍경 앞에서 ‘주주 자본주의’를 일찍이 도입한 영미권에서 수십년간 되풀이된 ‘주주의 이익이 기업·국가의 성장과 일치하는가’라는 질문이 한국 사회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시작된 주주 권한 강화가 한국 경제의 장기 성장과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다.
한화솔루션은 지난달 30일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유상증자 신고서를 다시 써오라”는 2차 정정 요구를 받았다. 앞서 지난 3월 이 회사는 태양광 투자에 따른 빚을 갚기 위해 주주들에게 2조4000억원을 더 투자해달라는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주식 숫자가 늘면 이미 발행된 주식(구주) 가치가 떨어진다. 소액주주들은 금감원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금감원은 “유상증자 신고서를 다시 써오라”고 정정 요구를 했고, 한화솔루션은 규모를 1조8000억원으로 줄여 재추진했으나 금감원은 두 번째 제동을 걸었다.
LS그룹 사례도 유사하다. 지난해 11월 LS그룹은 미국 자회사 에식스솔루션즈를 국내 코스피에 상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상장된 지주사 (주)LS의 핵심 자산을 따로 떼어 상장하는 구조였다. 소액주주들은 “주주 가치를 훼손한다”며 반발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공개 경고했다. LS는 결국 지난 1월 백기를 들었다. 배당금 40% 인상, 자사주 소각 등 주주 달래기 카드도 함께 내놨다. 이후 SK에코플랜트·HD현대로보틱스 등 중복상장을 준비 중이던 다른 기업들도 계획을 보류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이를 두고 그동안 주주의 이익은 뒷전이고 불투명한 방식으로 결정해온 유상증자·중복상장 관행이 바로잡혀가고 있다는 평가가 먼저 나온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문제의 핵심은 여태까지 한국 기업들이 주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던 것”이라며 “유상증자는 곧 주주들한테 돈을 빌려오는 건데, 이 조달 행위의 ‘비용’ 자체를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관행이 바뀌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일각에선 주주 권한 강화가 ‘단기적 주가 방어’에만 치우치면 기업의 장기 투자와 신산업 육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커진 주주 목소리, 경영진 견제 넘어 ‘이익 배분’ 문제로 번져
‘기업 자금 조달’이라는 증권시장의 주요 기능이 주주의 요구 앞에 가로막히는 건 본말이 전도됐다는 것이다.
이는 부동산 등 비생산적 영역에서 혁신 산업으로 금융의 판도를 전환하는 ‘생산적 금융’을 추진하는 이재명 정부의 기조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 지배구조가 낙후돼 있던 만큼 상법 개정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대기업들이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벗어나 신산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증자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회사 입장에선) 회사채 등 대출 방식으로는 장기적 투자가 어려워 상장이나 유상증자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걸 막아버리면 자금을 구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인공지능(AI)·반도체·2차전지 등 신산업 분야에선 대규모 자금 조달이 불가피하다.
커진 주주 목소리는 단순히 경영진 견제를 넘어 기업 이익을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로 번지고 있다.
삼성전자 노조가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난 영업이익의 15% 이상을 성과급으로 달라며 파업을 예고하자 주주들은 손해배상 소송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경영진·주주’의 충돌과는 별개로, 주주·노동자 등 회사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누가 먼저냐’를 놓고 주도권 다툼이 벌어진 모습이다. 결국 기업의 이익은 누구의 것이냐는 물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홍 광운대 경영학부 명예교수는 지난 6일 ‘한국 경제의 혁신 성장과 이해관계자 갈등’ 세미나에서 삼성전자 노조 요구를 두고 “주주는 손실을 감수하지만 근로자는 손실은 지지 않고 이익만 공유한다”고 지적했다.
주주들은 노동자·은행·채권자 등이 사전에 계약한 몫을 모두 가져간 뒤 남은 이익(잔여분)을 가져가므로, 더 많은 몫을 챙길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결국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이른바 ‘총수 일가’ 중심 경영에서 벗어나 주주·노동자·협력업체·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조율해야 하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한국형 주주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주주들을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볼 수는 없다”며 “국민연금 같은 장기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단기 주가와 장기 성장 사이 균형을 잡아야 한다”며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영진이 주주 환원 계획과 미래 투자 계획을 노조·주주 양측에 동시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회적 수용성을 고려해 협의해 나가는 것이 해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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