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석의 관측] 숟가락 문지르던 겨울
2026.05.08 17:58
나는 공군 작전병이었다. 내가 담당했던 작전은 실로 막중했는데, 비상대기하는 조종사들의 안락함을 지키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조종사들이 대기하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청소, 설거지 등 모든 기타 잡무를 했다.
영공에 미확인 물체가 나타나면 조종사들은 즉각 전투기를 몰고 출격해야 한다. 조종사들은 정해진 인원만큼 항상 비상대기실을 지킨다. 대비 태세를 위해 삼시 세끼를 비상대기실에서 먹는다. 난 그들의 수저와 밥그릇을 매번 설거지했다.
설거지가 너무 지겨웠다. 차라리 사격이 낫겠다 싶었다. 제일 짜증 나는 건 숟가락이다. 숟가락에 밥풀이 눌어붙으면 그 자국을 지우기 위해 수차례 문질러야 한다. 숟가락에 밥풀을 남기지 말자. 내가 군대에서 배워 온 삶의 지혜다.
비상출격은 본능의 영역이다. 비상대기실에서 전투기까지 뛰고, 사다리를 올라 전투기에 탑승하고, 시동을 걸고, 활주로에 나가고, 이륙까지가 몇 분 안에 끝난다. 조종사들은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도 비상출격 사이렌이 울리면 무작정 뛴다. 간혹 넘어져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2022년 12월 26일 평화로운 월요일 오전. 사이렌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조종사들은 모두 출격했고, 그 빈자리를 메우러 온 조종사들도 다시 출격했고, 그렇게 전투기 굉음이 이어졌다. 북한 무인기가 영공을 침입했다. 정말 전쟁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출격한 조종사들은 평소만큼 빨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설거지를 하면서 앞으로를 걱정했다. 내가 군대에서 제일 많이 한 건 설거지인데, 전장에서 난 무엇을 하게 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냥 계속 설거지를 하고 싶었다. 애꿎은 숟가락만 수세미로 자꾸 문질러댔다. 갑자기 누군가 와서 고무장갑 벗고 뛰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수도에선 따뜻한 물이 나오고 있었지만 뼛속까지 서늘했다.
다행히 그날 상황은 그럭저럭 끝났다. 그날 밤 조종사에게 물었다. 낮에 비상출격을 다녀와 피곤할 텐데도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대위님, 전쟁 나면 어떡합니까? 안 무서우십니까?"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 농담인 것처럼 물었다. 평소에 웃는 상이던 그가 웃지 않고 답했다. "군인이 전쟁에 나가는 건 안 무서워서가 아니야. 안 무섭다고 나가는 건 그냥 습관이지. 무서운데도 나가는 게 용기인 거고."
요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보면서 오랜만에 그 대위의 말이 생각났다. 트럼프는 스스로 아마 용감하다고 여길 테다. 군대를 보내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납치하고, 이란에 미사일을 쏘고 군대를 보내면서 그는 무서웠을까. 그건 용기였을까, 아니면 젠체하던 그저 습관이었을까.
지난달 트럼프는 한국을 포함한 몇몇 국가를 두고 "용기가 없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프로젝트 프리덤'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요구하더니 얼마 안 가 제멋대로 중단했다. 지금도 애꿎은 숟가락만 문지르고 있을 사람들이 가엾다.
뉴스를 보고 있자니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4년 전 겨울의 서늘함이 느껴진다. 어느새 이 서늘함이 익숙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제발 우리가 숟가락이나 씻고 있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최원석 과학기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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