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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재정 전환, 한국에 던지는 질문

2026.05.06 13:41

한국도 부채비율 중심의 낡은 논쟁을 넘어설 때다한국에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국가부채 수준에 대한 경고가 계속 나온다. 저출생·고령화·저성장으로 세입 기반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국가부채를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부채가 미래 세대의 부담을 키우고 국가 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반복된다.

그러나 같은 시기 유럽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럽연합은 오랫동안 안정·성장 협약을 통해 회원국의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를 엄격하게 관리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EU는 안보 위기를 단순한 국방비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공급망, 방위산업, 핵심 인프라, 기술 역량이 함께 걸린 구조적 위기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국방·안보 지출에 대해 재정준칙을 유연하게 적용하고, 국가 생존과 산업 기반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재정 공간을 열고 있다.

대표적인 장치가 '국가 예외 조항'이다. EU 이사회는 회원국들이 방위비를 늘릴 수 있도록 4년 동안 GDP 대비 최대 1.5%의 재정 유연성을 인정했다. 이는 단순히 군사비를 더 쓰라는 뜻이 아니다. 유럽은 안보를 방위산업, 첨단기술, 에너지 자립, 공급망 안정과 연결된 산업정책의 문제로 보고 있다. 회계상의 부채비율보다 국가의 생존 기반과 전략 산업 역량을 지키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럽은 더 이상 국방을 소모성 비용으로만 보지 않는다. 방위산업은 반도체, 인공지능, 우주, 사이버보안, 소재, 에너지, 제조 역량과 연결된다. 안보 지출은 곧 산업기반 투자이며,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재정 수단이 되고 있다. 유럽의 재정 유연화는 국방비를 예외로 간주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합 위기 속에서 국가의 생산능력과 전략산업을 지키기 위한 재정정책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기준 밖 지출'이 말하는 것

가장 대표적인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하게 재정준칙을 고수해 온 나라다. 헌법상 부채 브레이크를 통해 신규 차입을 엄격히 제한해 왔고, 재정건전성의 모범국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런 독일조차 최근에는 기존 기준만으로는 국가의 장기 생존능력과 산업경쟁력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독일은 국방특별기금에 이어 인프라 및 기후중립 특별기금을 조성하며 대규모 장기투자에 나섰다. 이 특별기금은 단순한 군비 확대가 아니라 교통, 디지털, 에너지, 교육, 돌봄, 병원, 연구개발, 기후중립 인프라 등 독일 산업과 생활 기반 전반을 현대화하기 위한 장치다. 독일은 방위 역량 강화와 함께 낡은 인프라를 갱신하고, 에너지 전환을 앞당기며, 제조업 경쟁력을 뒷받침할 기반을 다시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지출 확대가 아니다. 독일은 재정건전성의 기준을 바꾸고 있다. 과거의 기준이 "부채를 얼마나 억제하는가"였다면, 새로운 기준은 "부채를 통해 국가의 장기 생산능력과 생존능력을 얼마나 키웠는가"에 가깝다. 국방비 확대는 그 명분일 뿐, 실제 논리는 안보·인프라·에너지·산업경쟁력을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묶는 데 있다.

독일 사례에서 중요한 것은 규모보다 원칙이다. 독일은 평상시의 지출 구조를 그대로 두고 돈만 더 쓰겠다는 것이 아니다. 안보, 인프라, 기후중립, 산업경쟁력처럼 국가의 장기 기반을 좌우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기존 재정준칙 밖의 별도 공간을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재정건전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건전성을 장기적인 산업기반과 국가 생존능력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기계적 건전성'을 넘어야 한다

이 변화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기후 위기, 지정학적 대립, 공급망 재편, AI와 반도체를 둘러싼 기술 패권 경쟁의 시대에는 기계적인 재정건전성만으로 국가를 지킬 수 없다. 국가는 단순한 회계 관리자가 아니라 미래 산업과 국민경제의 기반을 설계하는 전략적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재정 논쟁은 오래도록 "국가부채를 얼마나 억제할 것인가"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국채로 조달한 공적 신용이 경제와 사회의 어떤 능력을 키우는가"이다. 재정은 민생을 떠받치는 데 쓰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경기 침체와 고금리 속에서 가계의 급격한 붕괴를 막고 소비 여력과 사회적 안전망을 지키는 일은 경제의 회복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국채 재원이 단기 효과에만 머물고 소득 기반을 넓히지 못한다면 부담으로 남는다. 반대로 민생 안정과 함께 인공지능, 반도체, 에너지 전환, 전력망, 데이터 인프라, 지역 산업기반, 돌봄·교육 체계처럼 생산성과 세입 기반을 키우는 분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빚이 아니라 생산적 국민자산이 될 수 있다.

재정건전성도 이 관점에서 봐야 한다. 부채를 줄였지만 산업 경쟁력과 잠재성장률이 낮아진다면 건전한 재정이라 보기 어렵다.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부채와 GDP의 관계다. 부채가 늘어도 그보다 국민소득과 생산능력이 더 빠르게 커지면 비율은 안정될 수 있다. 반대로 긴축으로 성장률과 세수가 낮아지면 부채비율은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재정건전성의 핵심은 "얼마나 덜 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지속 가능한 소득 능력을 키웠는가"에 있다.

국채는 단순한 빚이 아니다

이 논의를 이해하려면 국채의 기능을 함께 봐야 한다. 현대 경제에서 국채는 정부의 채무이지만, 금융시장에서는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기능한다. 국채의 안전성은 정부가 미래 세수를 확보할 조세권을 가지고 있고, 안정적으로 존속한다는 신뢰에 기반해 있다. 중앙은행은 주로 국채를 사고팔아 은행시스템의 지급준비금, 즉 본원통화의 양을 조절한다.

이 관행은 대공황 이후 확립되었다. 당시 미국의 화폐 발행은 주로 금과 단기 상업어음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불황이 오면 거래가 줄고, 거래가 줄면 상업어음도 줄어든다. 은행 대출이 위축되고 돈의 흐름도 함께 마른다. 위기일수록 돈이 더 필요한데, 오히려 돈이 줄어드는 구조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연준은 국채를 매입해 본원통화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화폐 공급은 금 보유량이나 민간 거래의 흐름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공적 신용이 현대 통화체계의 중요한 기반으로 들어온 것이다.

물론 중앙은행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국채 없이도 민간 자산을 매입해 본원통화를 공급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자산은 부실 위험과 특혜 논란이 있고, 외환자산은 환율과 대외 여건에 흔들린다. 반면 국채는 표준화되어 있고 거래가 쉬우며, 조세권을 가진 국가의 신용이 뒷받침한다. 그래서 국채는 현대 금융시스템을 움직이는 공적 담보에 가깝다.

따라서 국채가 지나치게 부족하면 은행, 연기금, 보험회사, 중앙은행이 안정적으로 활용할 안전자산도 부족해진다. 정부가 굳건하고 세입 기반을 유지하는 한, 적정한 국채는 위험 요인만이 아니라 금융시스템의 완충장치가 된다.

디플레이션은 부채를 더 무겁게 만든다

국채와 통화공급의 문제는 디플레이션과도 연결된다. 생산능력이 늘어났는데 통화량과 화폐 단위 기준의 명목수요가 충분히 늘지 않으면 물가는 하락 압력을 받는다. 겉으로 보면 물가 하락은 좋은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전체로 보면 디플레이션은 치명적이다. 기업 매출은 줄고, 이윤은 압박받으며, 무엇보다 부채의 실질 부담이 커진다. 물가는 내려가도 빚의 액면가는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기업이 과거의 가격과 수익 전망을 기준으로 돈을 빌려 투자했는데, 이후 제품 가격이 하락하고 매출이 줄어들면 기업 활동은 위축된다. 대출이 줄고, 통화량이 줄고, 수요가 다시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대공황이 보여준 부채-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바로 이것이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민간 신용이 무너질 때 공적 신용이 작동해야 한다. 현재의 제도에서 그 핵심 수단 중 하나가 국채다. 국채는 정부가 돈을 빌린 기록이면서 동시에, 위기 때 통화와 금융시스템을 떠받치는 장치이다.

한국적 시사점: 재정건전성의 새 해석이 필요하다

최근 유럽의 변화가 한국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재정건전성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재정건전성은 단순히 지출을 줄이고 부채비율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조세 기반을 훼손하지 않고, 국민소득과 생산능력을 키우며, 위기 때 경제와 사회를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근본적인 건전성이다.

따라서 재정건전성은 '얼마나 덜 썼는가'가 아니라 '지출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가'로 판단해야 한다. 긴축으로 부채 증가 속도를 낮췄더라도 산업 경쟁력과 잠재성장률이 약해지고 세입 기반이 줄어든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한 재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반대로 국채 발행이 민생의 붕괴를 막고 생산성, 기술, 인프라, 고용, 세입 기반을 키우는 데 쓰인다면 부채의 의미는 달라진다.

유럽과 독일의 변화도 이 점을 보여준다. 복합 위기의 시대에 국가는 장부상의 균형만 지키는 회계 관리자로 머물 수 없다. 안보, 에너지, 산업, 기술 경쟁이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국가의 장기 생존능력을 키우는 지출이 오히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

국채는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문제는 국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경제의 어떤 능력을 키우는가이다. 투기적 자산가격을 떠받치는 데 쓰인다면 위험한 부채가 되지만, 국민경제의 회복력과 미래 소득 기반을 넓히는 데 쓰인다면 공적 신용의 생산적 활용이 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재정 긴축을 건전성으로 동일시하는 관성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부채를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만들 수 없다. 재정건전성은 부채를 줄이는 기술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 소득과 생존능력을 키우는 정치경제적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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