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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YS·DJ가 모두 중용…'통일외교 거목' 이홍구 별세

2026.05.05 17:52

이홍구 前 국무총리 영면…향년 92세

서울대 정치학 교수 20년간 재직
'남북연합 후 통일' 기본 틀 마련
YS·김일성 회담 직전까지 이끌어
주미대사로서 외환위기 극복 기여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5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학계와 정계를 넘나들며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길잡이 역할을 한 고인은 노태우·김영삼(YS)·김대중(DJ) 등 세 정부에서 잇달아 중용돼 통일외교 분야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인은 1934년 경기도 개성시 남산동(현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남산동)에서 태어나 1953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한 이듬해 자퇴한 고인은 곧장 미국 유학길에 올라 에모리대 철학과를 거쳐 예일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 시절 폐결핵이 재발해 2년여간 병상에 머무는 시련을 겪은 그는 훗날 칼럼에서 “침상에 누워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에서 조지훈 시인의 ‘마음의 태양’을 되뇌며 버텼다”고 토로했다.

1968년 귀국한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돼 2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정치학회장과 세계정치학회(IPSA) 집행위원을 지내며 한국 정치학 연구 기반을 다졌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을 토대로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탐구했으며 남북관계·국제정치·정치사상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와 논설 활동을 이어갔다.

1988년 노태우 정부 때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으로 발탁돼 공직에 입문했다. 1989년 여야 합의로 마련된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설계하며 통일 정책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을 거쳐 통일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간다는 구상이 핵심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 직전까지 이끌었다. 1994년 6월 판문점에서 북한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와 만나 그해 7월 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그러나 예정일을 17일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회담이 끝내 무산됐다. 그해 12월 국무총리에 오른 고인은 김영삼 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화를 앞장서 추진했으나 이듬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터지면서 총리직을 사임했다. 사고 당시 총리 공관에서 바누아투공화국 총리와 공식 만찬을 하다가 양해를 구하고 현장으로 달려간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1996년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합류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선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도 출마했지만 석 달간 고군분투하다가 중도 포기했다. “정책보다 정쟁에 매달리는 현실 정치 앞에 좌절했다”고 고백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초대 주미대사로 발탁돼 한미 관계 안정과 국제 신인도 회복에 힘썼다. 고인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미국 주요 인사를 만나 한국을 도와달라고 설득했다”고 회상했다.2000년 귀국한 이후에는 언론계에 투신했다. 한 신문에 ‘이홍구 칼럼’을 게재하며 정치·외교 현안에 대한 견해를 제시했다. 서울국제포럼 이사장, 유민문화재단 이사장, 아산재단 이사, 대한배구협회 고문 등을 맡기도 했다. 생전 “권력을 나누는 분권은 국가의 힘을 키우는 길”이라며 권력 구조 개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원로 지식인으로서 ‘정치사상과 자유의 모색’, ‘인간화와 정치’, ‘전환시대의 위기 통일한국의 미래’ 등 저서를 남겼다. 1996년 청조근정훈장, 1997년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훈했으며 2023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뽑히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한옥 씨와 아들 이현우 EIG아시아 대표, 딸 이소영 씨·이민영 동덕여대 교수, 며느리 황지영 홍콩한인여성회장, 사위 이강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8일 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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