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욱의 한반도 워치] 이스라엘과 이란, 북한의 핵보유 전략은 어떻게 달랐나
2026.05.05 23:33
北 비핵화는 골든타임 놓쳐… 5년 후 북핵은 세계 6위 수준 이를 듯
1960년 12월 18일 세계 언론들은 일제히 특보(特報)를 냈다. 중동의 작은 나라가 핵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라고 지목했다. 소련 정찰기가 촬영한 디모나 현장 사진이 실린 뉴스는 일파만파로 퍼졌다. 소련 외교부 장관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사태 해결을 압박했다. 벤구리온 이스라엘 총리는 “네게브 사막에 건설 중인 연구용 원자로는 오직 평화적인 목적”이라고 항변했다.
2년간 논란 끝에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 개발 총책인 시몬 페레스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이스라엘의 의도는 무엇인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페레스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중동에서 핵무기를 처음 꺼내 드는 쪽이 저희는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라고 했다. 케네디는 엎질러진 일이라 판단했는지 혹은 엄청난 유대인 로비에 체념했는지 별말 없이 면담을 끝냈다. 핵무기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페레스의 ‘핵 모호성(NCND)’ 전략은 이스라엘의 핵 정책이 됐다.
페레스는 이스라엘의 비대칭 핵 무력으로 아랍 국가들이 전면전을 감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스라엘 모래땅에 원전은 필수적이라고 설득했다. 모사드 등 정보기관은 소련의 개입을 의식해 반대했다. 과학자는 원천기술 부족, 관료는 막대한 재원 등을 들어 일축했다. 벤구리온 총리는 젊은 핵 선구자의 통찰력을 수용했다. 마침내 1966년 중동에 첫 핵 국가가 탄생했다.
이란은 텔아비브의 핵 개발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란은 우라늄 농축 기술을 연구했다. 1970년에는 핵비확산조약(NPT)에도 가입했다. 팔레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과 평화적인 원전 이용을 협의했다. 이란 핵의 일차 씨앗은 1979년 이란 혁명이었다.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하메네이 반(反)서방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과의 협력은 중단됐다.
1980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벌인 8년 전쟁은 이란 핵개발의 단초가 됐다. 종전 후 1989년 2대 지도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는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친구는 없다”며 핵에 집착했다. 이란 신정체제 붕괴가 국가 목표인 이스라엘의 핵 역시 이란의 핵 개발을 자극했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 IAEA의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2000년대 들어 이란이 레드라인인 20% 우라늄 농축을 넘어서자 국제사회가 비핵화에 나섰다. 2015년 미국을 비롯한 6국과 이란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이라는 역사적 핵 협상을 타결했다. 15년간 이란의 우라늄 농축 금지가 포함됐다.
2003년 이란이 IAEA의 사찰을 수용한 이후 12년간 진통 끝에 타결된 160쪽에 달하는 본문과 5개의 기술 부속서는 핵물리학과 제재의 국제정치학을 통합했다. 이행은 어려웠다. 비핵화와 제재 해제 관련 문장 하나하나 고무줄 해석이 가능해서 논란은 불가피했다. 공식적인 조약이 아니라 단순 합의(accord)에 불과해 미국 정권이 교체되자 휴지 조각이 됐다는 것이 테헤란의 주장이다. 2018년 협상을 탈퇴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과 지난 2월 말 폭격 등으로 핵 시설을 타격했다. 이란 전쟁의 명분인 핵 완성이 2주 정도로 임박했는지 여부는 정보 부족으로 판단 불가다.
핵보유 동기 이론과 냉전 전략가인 허먼 칸(Herman Kahn)의 ‘확전 이론(On Escalation)’에 따르면 특정국의 핵무기는 인접국의 핵 보유를 자극한다. 천연 우라늄이 풍부한 이란이 핵 개발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우라늄의 평화적 이용은 주권적 권리라는 강경파의 주장은 완강하다. 이란이 보유한 60% 수준의 440㎏ 우라늄은 농축을 80% 수준으로 높이면 핵무기 11기가 된다. 이란은 트럼프의 조급함을 역이용하며 ‘침대 축구’를 하고 있다.
동북아로 가보자. 1945년 일본이 원자탄 두 발에 항복했다는 소식에 놀란 김일성은 핵에 관심을 가졌다. 1953년 7월 휴전 무렵 전쟁 잿더미에서 원산에 핵물리학 도서관을 열었다. 소련 드브나 연구소에 핵물리학자 30명을 파견했다. 2006년 1차 핵실험 때까지 북한 정권의 역사는 핵 개발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광산국이 탐사한 보고서는 북한의 우라늄은 양질이며 매장량이 400만t에 달한다고 했다. 비공식 세계 12위다. 김일성이 이란처럼 핵에 집착할 수 있었던 물리적인 이유다.
이스라엘과 이란 및 북한 3국은 판도라의 상자인 핵 보유에 진심이다. 3국의 핵 보유 비교를 통해서 미래를 조망해보자. 첫째, 핵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우라늄 매장량은 이란과 북한의 공통점이다. 이스라엘은 원료를 수입한다. 둘째, 이스라엘은 프랑스로부터 100% 기술을 전수받았다. 이란과 북한은 자체 개발과 파키스탄 핵 아버지인 압둘 칸 박사로부터 농축 기술을 지원받았다. 셋째, 이스라엘이 핵 개발을 본격화한 1950년대 말은 1964년 중국 핵실험과 1972년 비확산(NPT) 체제의 감시 이전이었다. 냉전 체제의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핵 보유에 성공했다.
북한은 황해북도 평산군 광산에서 우라늄 원석을 채굴했다. 김소월 시인의 고향인 영변에 암반 지형과 구룡강 용수 등을 활용해서 농축 시설을 건설했다. 한미 간 논란이 된 구성시에도 핵 시설을 건설했다. 최근 위성 정보에 따르면 영변과 평산에 우라늄 정광(yellowcake) 생산 시설을 증축하며 고농축 우라늄(HEU)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이란과 달리 북한의 핵 열차는 이미 출발했다. 비핵화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5년 후면 핵무기는 세계 6위인 인도 수준에 도달한다.
이란 전쟁은 핵 보유와 비핵화를 둘러싼 길고 긴 싸움이다. 일찌감치 핵을 보유한 이스라엘과 후발 주자 이란 간 충돌은 초크포인트(chokepoint)인 호르무즈 해협 위기로 종착지가 불확실하다. 이슬라마바드 협상이 이란 비핵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휴전과 종전은 장기전이다. 이란을 북한처럼 방관하지 않겠다는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의 발언은 귀추가 주목된다.
백악관과 이란 혁명수비대 간 충돌은 극단으로 치닫는 치킨게임이다. 미국이 무력으로 해협을 개방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다시 지역 분쟁에 발목이 빠질 것이다. 호르무즈의 정상화는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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