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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철 칼럼] 뱅크시의 경고… ‘이념의 깃발’이 초래할 공멸

2026.05.05 17:30

강현철 논설실장
강현철 논설실장


지난달 말 영국 런던의 도심 워털루 플레이스(Waterloo Place)에는 하룻밤새 양복을 입은 남성이 한 손에 깃발을 들고 서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설치됐다. 거리의 예술가 뱅크시가 만든 작품으로 ‘깃발에 눈이 먼 남자’(A Man Blinded by His Flag), ‘맹목적인 믿음’(Blind Faith)으로 불린다. 남성은 ‘낭떠러지’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세차게 나부끼는 깃발에 얼굴과 눈이 완전히 가려져 천길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신념에 가득찬 모습으로 막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딛을 기세다.

뱅크시의 조각상을 보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처한 상황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이라는 ‘깃발’에 사로잡혀 스스로 눈을 가린채 파멸에 이르는 비극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내건 ‘이념의 깃발’ 사례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도그마’ (Dogma) 아래 국익이나 민생을 팽개친 것들이다.

요즘 뜨거운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 이슈만 해도 그렇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효율적인 전쟁 수행과 미군(유엔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창설된지 얼마 안된 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이양한다. 전작권 역사의 시작이다.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전작권을 본격 행사한 건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국군 3개 사단이 중공군에 궤멸돼 무려 1만9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다. 한국군이 전작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국군 해병 제1연대를 미 해병 1사단에 배속시키는 강수를 둔다.

작전통제권은 평시엔 한국군이, 전시엔 한미연합군 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 겸임)이 갖는다. 민주당과 정부는 미군이 전작권을 갖고 있는 게 주권국가로서 있을 수 있는가라며 조기 환수를 추진 중이다. 외국 군대에 국방을 맡기는데 찬성하거나, 자주국방에 반대하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전작권을 환수할 경우 대한민국이 스스로 안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시 주한미군 2만8500명 외에도 미 본토 미군과 태평양함대, 주일미군 전력을 투입해 한·미가 합동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그 지휘를 미군사령관이 하는 것이 전작권이다. 전작권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존망의 ‘능력’ 문제인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옛부터 늘 ‘국제전’이었다. 중국 등 북방 세력의 침략이 가장 많았으며, 일본 또한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해 여러 차례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였다. 한국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안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정학적 위치상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한꺼번에 보고 대비해야 한다. 북중러의 위협에 한국 홀로 방어할 능력이 되는가가 핵심이다.

게다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은 우크라이나 파병 대가로 러시아의 지원 아래 핵과 미사일 능력, 구축함, 잠수함, 장사정포, 초대형 방사포 등 재래식 무기의 고도화를 위협적으로 추진 중이다. 북한이 핵무기나 미사일을 발사하면 우리에겐 이를 사전 감시·정찰할 저궤도 위성도 없고, 지하 벙커를 타격할 전략폭격기도 없으며, 고고도에서 요격할 자체 미사일도 아직 없다. 대한민국은 세계 5대 군사강국이라거나 K방산 수출 호조에 따른 ‘방산 국뽕’으로만 대응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만약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이나 일본의 도움없이 한국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전작권 환수는 감성에 호소할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위와 관련된 것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구성 핵시설 발언 이후 미군의 정보 공유 제한으로 지금 우리 군은 북한의 핵관련 활동에 대한 최신 정보에 ‘깜깜이’다. 전작권 논란은 ‘자주권’이라는 화려한 깃발‘에 가려져, 정작 그 아래 놓인 ’냉혹한 안보 현실‘이라는 낭떠러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유럽 방위의 핵심인 나토(NATO)군 전작권도 사실상 미군에 있다. 전 세계에서 자주국방을 할 수 있는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다. 초강대국인 미·중·러도 상호방위조약으로 자국의 국가 안보를 지키고 있다.

4월 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워털루 플레이스에 등장한 조각상. 얼굴을 깃발로 가린 남성의 모습으로 하단에는 ‘뱅크시’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EPA 연합뉴스]


전작권 문제만이 아니다. 4대강 사업 또한 ‘정책의 이념화’가 불러온 길고 격렬한 논쟁 중 하나다. 준설을 통해 본류의 홍수위를 최대 2.4m까지 낮췄고, 16개 보를 통해 가뭄 시 비상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4대강 사업이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수질을 크게 개선했으며, 홍수 피해를 줄였다는 데 대해선 이견이 없을 것이다. SK하이닉스 이천공장은 여주보 상류 취수장에서 매일 11만톤을 끌어다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 용인 클러스터에도 여주보에서 하루 26만5000톤 취수가 예정돼 있다. 4대강 사업이 없었다면 반도체 생산도 위협받았을 상황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친환경 극단주의자들의 ‘녹조 라떼’를 구실로 여전히 보 해체를 저울질 중이다. 가뭄에 보를 개방해 물 부족 고통을 겪은 농민들의 아우성엔 관심이 없다.

원전 정책은 한편의 ‘코미디’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바람에 광복 이후 피와 땀으로 키워온 원전 산업이 하루아침에 망가질 위치에 처했었다. AI(인공지능) 붐에 따른 전력 수요 급증으로 이재명 정부들어 다시 원전 신설과 재가동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국가적 손해는 천문학적이다.

민주당은 이념의 깃발을 내걸고 ‘다수당의 폭정’을 이어가고 있다. 기업들의 우려에도 불구, 끝내 입법한 노란봉투법은 노조의 무한 파업을 부추기면서 산업현장을 위협한다. 임대차 3법에 이은 다주택자 중과세, 장기보유특별공제 축소, 주택대출 규제는 서민들의 주거를 해치고 있다. 개정 상법은 기업 경영권을 침해하고, 기업들을 외국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만든다. 형사사법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검찰청 폐지, 정치 검찰이라는 비판을 듣는 특검, 언론 자유 침해 논란을 빚는 방송 4법과 정보통신망법 개정 등 이념에 치우친 정책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민주당은 자신만이 옳다는 ‘도그마의 함정’에 빠져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이 이런 폭주에 영원히 면죄부를 부여할 것이라는 건 착각일 것이다. ‘윤 어게인’의 미련을 못버린 국민의힘 일각도 민주당과 마찬가지다. 이념의 깃발에 사로잡혀 대한민국을 공멸의 길로 가게 하지 않으려면 여야는 지금이라도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오는 지방선거가 첫 시험대일 것이다.

논설실장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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