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슈즈를 떨어뜨리는 순간”…중력과의 화해가 시작된다 [인터뷰]
2026.05.04 20:33
안무가 강효형x서울발레단의 만남
오는 15~17일, ‘인 더 밤부 포레스트’
토슈즈 속박 던지고 비움으로 해방
클래식, 컨템, 한국 춤의 삼위일체
오는 15~17일, ‘인 더 밤부 포레스트’
토슈즈 속박 던지고 비움으로 해방
클래식, 컨템, 한국 춤의 삼위일체
| 안무가 강효형x서울발레단의 ‘인 더 밤부 포레스트’ [세종문화회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다섯 그루의 대나무가 쭉 뻗은 무대. ‘밤부(Bamboo, 대나무)의 정령’ 같은 무용수들이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팔과 다리, 토슈즈에 의지해 한 쪽 다리로 중심을 버티는 선이 팽팽하다. 몸은 느리게 흔들리고, 축은 무너지지 않는다. 바람에 휘어질지언정, 끝내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유연하고 반듯하다.
F=ma.(뉴턴의 운동 제2법칙) 지구 위의 모든 것은 초속 9.8m/s²의 속도로 추락한다. 뉴턴의 사과처럼, 인간의 몸은 무자비한 중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는 그 법칙을 잠시 유예하는 존재다. 질량(m)을 0의 근사치로 만들어 깃털처럼 도약하고 허공에 부유한다.
“토슈즈는 클래식 발레의 정체성이에요.”
안무가 강효형은 토슈즈를 신기 위해 발레 무용수들은 무수히 많은 시간을 쌓는다고 말한다. 토슈즈 위에 선다는 것은 발끝 하나로 몸 전체를 밀어 올리는 일이다. 무용수들은 수년간 자기 몸을 깎고 단련해, 인간의 체중을 지워내는 기술을 익힌다. 그러니 “토슈즈 자체가 역량이자, 발레리나가 강인하게 설 수 있는 도구”(강효형)다. 그것에서 해방된 춤이 컨템포러리 발레다. 곧은 자세의 발레리나는 철저히 통제된 몸을 무너뜨린다.
곧추세운 몸으로 유영하던 발레리나가 토슈즈를 떨어뜨린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중력을 거스르던 춤은 중력에 기꺼이 항복해 자유를 노래한다. 바닥으로 몸을 던지고, 구르고, 무너진다. 토슈즈를 벗은 육체는 더 이상 허공에 머물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저 지면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 틈새로 한국 춤의 호흡이 스며든다. 중력에 저항하지도 투항하지도 않는 춤, 떨어질 듯 멈추고 풀어질 듯 다시 중심을 낚아채는 춤이다. 한국 춤의 정중동(靜中動)은 낙하 직전의 찰나를 붙잡아 호흡으로 어른다.
강효형의 춤은 이 경계에서 태어났다. 클래식 발레의 수직성, 컨템퍼러리의 해방감, 한국 춤의 호흡이 뜨겁게 충돌하고 유려하게 화해한다. 서울시발레단의 ‘인 더 밤부 포레스트(In the Bamboo Forest)’(5월 15~17일, 세종문화회관 M 씨어터)다.
최근 서울 노들섬에서 만난 강효형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종합선물세트처럼 클래식과 컨템포러리 발레, 한국 춤의 요소가 얽히게 됐다”며 “이것이 안무가 강효형만의 스타일이자 오리지널리티”라고 말했다.
| 창단 전부터 서울시발레단의 섭외 0순위로 이름을 올렸던 안무가 강효형 [세종문화회관 제공] |
창단 전부터 섭외 0순위…“안무가는 요리사”
이미 창단 당시부터 섭외 0순위 안무가였다. 이들의 만남은 특별하다. 한국 클래식 발레를 상징하는 국립발레단의 솔리스트와 ‘오늘의 발레’를 표방하는 서울시발레단의 조우이기 때문이다.
올해로 국립발레단 입단 18년 차가 된 그는 “무용수로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에 지난해 희망퇴직을 신청, 온전히 창작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이번 무대는 그가 국립발레단의 울타리를 벗어나 내놓은 첫 번째 전막 창작 발레다.
지난 3년간 강효형은 서울시발레단을 집요하게 지켜봤다. 창단작 ‘한여름 밤의 꿈’부터 샤론 에얄의 ‘재키’까지 모든 작품을 섭렵하며 단원들의 에너지를 분석했다.
그는 “안무가에 따라 단원들의 잠재력과 숨은 재능이 터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며 “직접 와서 보니 단원들의 기량이 그야말로 물이 올랐다”고 했다.
차근차근 성장해 온 서울시발레단은 그간 한스 판 마넨, 오하드 나하린, 요한 잉거와 같은 거장 안무가의 작품으로 관객과 만났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을 주로 해온 신생 단체에, ‘서울시발레단만의 레퍼토리’를 입히는 숙제를 강효형이 맡게 됐다. 그는 “안무가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올려 최적의 페어링을 찾아내는 요리사와 같다”며 “주어진 재료를 딱 맞는 곳에 써 최상의 요리를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20명가량의 단원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해 그는 대나무라는 소재를 차용, 깊은 사유로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안무가 자신과 발레단의 정체성을 재정립했다. 그렇기에 ‘인 더 밤부 포레스트’는 신작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강효형에겐 무용수에서 창작자로 넘어가는 선언이고, 서울시발레단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본격적 시도다.
“클래식 발레를 기반으로 하는 컨템포러리 발레는 모던 댄스와는 완전히 달라요. 다리를 뻗는 선부터 테크닉까지 큰 차이가 있죠. 이 단체는 현대무용단이 아닌 발레단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어요. 토슈즈를 신고도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최강점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 안무가 강효형x서울발레단의 ‘인 더 밤부 포레스트’ [세종문화회관 제공] |
사군자 세계관의 두 번째…대나무의 ‘위대한 비움’
강효형의 안무에서 ‘사군자’ 세계관은 흥미로운 교집합이다. 2017년 국립발레단에서 선보인 ‘허난설헌-수월경화’가 시적 감수성을 품은 ‘난초(蘭)’였다면, 이번 신작은 곧은 절개의 ‘대나무(竹)’다.
막이 오르면 무대는 ‘현대인의 번민’으로 가득 찬다. 통제되지 않는 상념이 주인공의 내면을 옥죈다.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에 떠밀려 당도한 곳이 대나무 숲. 강효형은 “현대인의 삶은 불필요한 자극과 핸드폰 속의 정보가 시시각각 침범한다”며 “내 안에부터 통제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귀띔한다.
번민을 담은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작품은 (숲으로의) 진입, (대나무의) 존재, 호흡과 비움, 뿌리내림, 성장, 회복으로 이어지는 6개의 리추얼(Ritual, 의식)을 완성한다.
1장에서 ‘바람’이 주인공의 뺨을 스치며 상념을 쓸어내리면, 무용수들은 대나무를 몸의 언어로 구현한다. 그 뒤로 하나의 ‘선언’이 등장한다. 꼿꼿하게 선 발레리나들이 포인트 슈즈를 벗어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장면이다. “내려놓음의 시작”이자, “집착을 버리는 가장 명징한 선언”이라고 강효형은 강조한다.
“대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이유는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에요. 비움은 허무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성장의 전제 조건이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자연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매개체로서 대나무가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명상처럼 시작하는 비움의 장(3장)에선 한국적 호흡을 통해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안무가는 이를 “나를 비워내는 의식”이라고 했다. 몸은 낮아지고 호흡은 길어진다. 무용수들은 바닥으로 추락하듯 내려앉고, 다시 숨으로 척추를 세운다. 강효형은 “대나무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다”며 “그 시간은 지난하지만, 한 번 자리를 잡으면 하루에 30㎝씩 폭발적으로 성장한다”고 했다. 그 모습을 춤으로 옮기니, 생명력이 움튼다.
| 안무가 강효형x서울발레단의 ‘인 더 밤부 포레스트’ [세종문화회관 제공] |
호흡이 어깨를 타고 음악이 될 때까지…한국적 미학
연습실에서의 강효형은 ‘디테일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다. 초 단위로 안무를 확인하는 그는 ‘될 때까지’ 무한 반복을 강조한다. 강효형이 가장 집요하게 매달리는 부분은 ‘호흡’이다. 그는 “호흡이 없는 춤은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용수들의 생존을 위한 춤일 뿐 살아있는 에너지가 오진 않는다”고 했다.
리허설이 끝나면 어김없이 “호흡이 어깨까지 들어와야 한다”, “호흡으로 채우지 않으니 박자가 빨라진다”, “호흡을 채우면 음악까지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심지어 역설적 주문이 더해졌다. 발레는 호흡을 위로 끌어올리는 장르인데, 강효형은 반대의 호흡법을 요구한다.
“하체는 토슈즈를 신을 수 있는 기량을 꼿꼿하게 유지하면서, 상체는 한국 춤의 맺고 푸는 호흡을 따라가야 해요. 두 호흡이 충돌할 때 무용수의 몸 안에서 긴장과 이완이 공존하며 묘한 춤의 질감이 나와요.”
그의 치밀함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은 술대가 현을 묵직하게 내리치고, 다시 활처럼 휘어지는 실험적 사운드를 구축했다. 강효형은 “박다울은 거의 무(無)의 상태에서 장면의 키워드만 듣고 음악을 만들었다”고 했다. 거문고의 진동 위로 숨소리 같은 리듬이 흐르고, 무용수들의 호흡은 리듬 사이를 미세하게 파고든다. 음악과 안무는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공간을 채우고, 들숨과 날숨 사이 공백을 몸의 언어로 메운다.
‘인 더 밤부 포레스트’는 강효형이 축적한 시간의 역사다. 2015년 ‘요동치다’를 시작으로 ‘허난설헌-수월경화’, ‘호이 랑’, ‘활’ 등 총 10편의 작품을 거치는 동안 그는 줄곧 ‘한국적 발레’의 가능성을 천착해 왔다. 예중 시절부터 몸에 익힌 한국 춤의 감각과 컨템퍼러리 발레에 대한 깊은 관심이 클래식 발레의 문법 안에서 유기적으로 버무려져 그의 DNA에 새겨졌다. 클래식과 컨템퍼러리, 한국 춤이 삼위일체를 이룬 ‘21세기형 한국 발레’가 탄생한 배경이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전통 음악이나 한국 춤의 호흡, 정중동의 미학은 제게 더없이 세련된 언어였어요. 서양의 춤은 닿지 못하는 깊이와 여백이 그 안에 있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안무가이기에 제가 가장 잘 아는 것을 춤으로 옮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데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어요. 그게 제 창작의 시작점이에요.”
토슈즈 위에서 중력을 거스르던 몸은 마침내 땅의 호흡을 받아들인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육체는 다시 숨으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뻗는다. 강효형의 ‘대나무 숲’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흔들리며 버티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가슴 속에 쌓아둔 것을 비워내 새로운 힘을 얻어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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