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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호흡기 낀 채 계좌번호 부른 유언...대법 “유효”

2026.05.04 16:06

‘구수증서’ 이유로 은행 지급거절
1·2심 “녹음 유언 못할 정도 아냐”
대법 “사망자 신체상태 단정 못해”


대법원 전경. <사진=연합뉴스>
임종을 앞둔 암 환자가 자신의 예금 계좌번호 등을 직접 불러주며 남긴 구두 유언을 인정하지 않은 법원 판결을 대법원이 파기했다. 병세 악화 때문에 자필증서나 녹음 등의 방법을 쓸 수 없었던 점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A씨가 우리은행을 상대로 낸 예금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지난달 2일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의 이부형제 B씨는 2021년 4월 암으로 숨지기 사흘 전 증인들 입회 하에 A씨에게 예금 9600만원을 증여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B씨는 폐암 말기에 코로나19에 걸려 호흡곤란, 폐렴 등을 앓았다. 유언을 남길 때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 진정제를 맞고 산소호흡기를 찬 상태였다.

A씨는 유언에 따라 예금을 지급해달라 했지만 우리은행은 이를 거절했다. 유언이 녹음이나 증서의 형태가 아닌 ‘구수증서’라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구수증서는 증인들에게 말로 유언을 남기고 서명을 받는 방식이다. 민법상 유언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형태를 원칙으로 한다. 질병 등 급박한 이유로 불가피할 때만 구수증서 유언의 효력을 인정한다.

1·2심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B씨가 유언을 남길 때 전세보증금과 예금계좌 번호를 말하는 내용이 녹화된 점을 들어 구수증서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언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말할 정도의 상태였다면, 예외적인 구수증서 방식 대신 녹음 등의 방식을 택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유언장이 작성될 당시 B씨는 자신의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 상대방 등을 충분히 인지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녹음에 의한 방식으로 유언을 할 수 없었다고 보기 어려워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당시 B씨의 상태를 고려하면 구수증언 효력이 인정된다고 봤다. 호흡곤란으로 산소호흡기를 껴 자유롭게 말을 하기 어려웠고, 유언일로부터 3일 뒤 사망한 점을 고려하면 다른 방식의 유언이 가능했으리라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망인은 유언의 목적인 3건의 예금채권 중 2건의 계좌번호만을 기억에 의존해 어눌하게나마 말할 수 있었다”며 “스스로 유언의 전체 취지를 육성으로 녹음해 녹음에 의한 유언을 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법원은 “유언의 요식성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이유는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하게 하고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며 “보조수단으로 이뤄진 녹음 또는 녹화물에 나타나는 유언자의 모습이 자신의 재산상태 등을 인지하고 말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해서 바로 구수증서 외에 녹음에 의한 방식으로 유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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