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관행? 의사들 무더기 '사기 대출' 피의자 전락
2026.05.04 09:00
브로커 통해 허위 잔고증명서 만든 뒤 신보 보증 제도 악용해 거액 대출
"안 쓰면 바보" 개원가 관행 민낯 드러내…집유 이상 확정되면 면허 박탈
악연의 시작은 2023년 2월이었다. 수도권에서 산부인과 병원 개업을 준비하던 이도연씨(가명)는 선배 의사로부터 '개원 컨설팅 전문가'를 소개받았다. 다수의 개원 총괄 이력을 내세웠던 A씨는 인테리어부터 의료 장비까지 거액의 대출이 불가피했던 이씨에게 "국가 보증으로 최대 10억원을 저금리로 땡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A씨가 내민 카드는 신용보증기금(이하 신보)의 '예비창업보증' 제도였다. A씨가 제안한 방법을 그대로 실행해 총 6억원의 예비창업보증을 받아낸 이씨는 3년이 흐른 2026년 4월28일,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됐다. '병원장'에서 사기 대출 브로커와 공모한 '피의자' 신세가 된 이씨는 최악의 경우 의사면허를 박탈당할 처지에 놓였다.
의사 215명 엮인 1300억원대 사기 대출
서울 수서경찰서는 현재 이씨를 포함해 총 215명의 의사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 혐의로 입건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 입건된 의사들은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개원 과정에서 예금 잔고를 허위로 부풀리는 방식으로 신보의 예비창업보증서를 발급받은 혐의를 받는다. 브로커 A씨와 의사 이씨 사이의 '검은 연결고리'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경찰이 특정 기간 동안 신보의 보증 심사를 통과한 의사 전체로 수사망을 넓히자 의료계 전반에 만연해 있던 불법행위도 민낯을 드러냈다. 일부는 개업 용도로 불법 대출을 받아 아파트 구매 자금에 활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병원장들이 엮인 불법 사기 대출 규모를 1300억원대로 추산하고 있다.
수서경찰서 관계자는 "입건된 의사 215명에 대해 예외 없이 전원 소환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조사 대상이 많고 개인별 자금 집행 세부내역과 혐의 등을 면밀히 들여다봐야 해 조사 마무리까지는 시일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예비창업보증은 말 그대로 창업을 계획하고 있는 예비창업자가 제출한 사업계획서 등을 검토, 심사를 통과한 대상자에게 신보가 대출 보증을 서주는 제도다. 예비창업자의 경우 담보 제공을 통한 대출이 어렵기 때문에 신보가 보증을 서서 시중 은행으로부터 자금 조달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신보 보증을 통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금리와 보증료율 등을 우대적용 받아 일반 사업자 대출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창업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예비창업보증은 10억원의 지원 한도 내에서 90%~100%까지 보증을 해주는 정책 금융이기 때문에 은행 입장에서도 대출을 내주는 데 있어 리스크가 현저히 줄어든다. 신보는 의사나 약사, 한의사, 변호사 등 전문 자격증을 보유한 직종의 '개원'도 창업으로 인정해 이 보증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의료계 전문 직종인 의사와 약사 등이 보증 심사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구조여서 연간 5000억~1조원대의 예비창업보증 예산을 사실상 '싹쓸이' 해왔다.
특히 브로커들은 신보가 고액의 예비창업보증을 받는 경우 제출하도록 한 자산 증빙 요건을 범죄의 도구로 활용했다. 신보는 '5억원이상 10억원까지의 예비창업보증을 받을 경우 본인 자산이 동일한 수준으로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런데 자산 5억원이상을 증빙하는 자료는 보증 신청 시점에 제출한 '잔고증명서' 단 1장으로도 충분했다.
자금책을 끼고 활동한 브로커들은 개원을 앞둔 의사들에게 이른바 '잔고 찍기' 수법으로 의사 명의의 계좌로 수억원을 일시 이체해주는 방식으로 허위 잔고를 만들어줬고, 의사가 잔고증명서를 활용해 신보 보증을 받으면 3% 안팎의 수수료와 함께 이를 회수했다. 이번에 적발된 브로커 다수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와 계약된 대출모집법인으로부터 업무 위탁을 받은 대출상담사로, 신보의 취약한 예비창업보증제의 시스템 구조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앞선 사례의 의사 이씨 역시 대출상담사였던 A씨에게서 컨설팅 받은 방법대로 신보 보증 및 대출을 실행했다. 이씨는 2023년 3월14일 은행에서 잔고증명서를 발급 받은 직후 브로커에게 6억원을 반환했다. 이씨 계좌로 브로커 측이 자금이 들어왔다가 나간 시간은 단 하루였는데, 이씨가 이자 명목으로 지급한 수수료는 1000만원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브로커와 개원의들 사이에는 수년에 걸쳐 사기 공범 커넥션이 형성됐다.
"터질 게 터졌다"…무더기 면허 취소되나
시사저널이 입수한 피의자들의 자수서나 의사와 브로커 간 대화 내용을 종합하면, 의료계에서는 신보의 예비창업보증제를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불법적으로 활용해 온 정황이 뚜렷했다. 의사나 약사, 한의사 커뮤니티에서도 2014년 도입된 이 예비창업보증제를 두고 "안 쓰면 바보"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개원의의 필수 코스 중 하나로 인식돼왔다.
이번 사건 수사의 단초가 된 '광덕안정 사태'가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도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 이유다. 전국적으로 한의원 및 치과 프랜차이즈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광덕안정은 신보의 보증 제도를 악용해 259억원대의 사기 대출을 기획한 점이 드러나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은 개원을 원하는 페이닥터를 모집한 뒤 광덕안정 본사 차원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며 서류 조작과 자금 융통을 조직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범인 대표와 부사장 등은 1심에서 징역 3~4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관련 수사를 이어 온 수서경찰서는 이번 입건과 별개로 지난해 11월에도 2000억원대 규모의 사기 대출 가담 혐의로 의사 249명과 약사 29명, 브로커 2명을 송치한 바 있다.
의료계를 정조준한 수사가 '무더기 의사 면허 취소'라는 초유의 사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긴장감이 더 커진다. 2023년 11월부터 시행된 개정 의료법에 따르면,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를 포함해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 받으면 의사 면허가 자동으로 취소된다. 집행유예만 받아도 의사 면허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검찰에 송치되거나 피의자로 입건된 의사들의 경우 대부분 신보 보증금액이 5억원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반 사기죄가 아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이 적용된다. 특경법이 적용되면 5억원이상~50억원미만의 경우 최소 3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지기 때문에 집행유예를 받는 것조차 쉽지 않다. 법조계와 의료계에서는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이 나지 않고, 실제 기소로 이어질 경우 실제 면허 박탈 사례가 나올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브로커들이 면허 취소 위기에 놓인 의사들에게 또 다시 접근해 '신보 보증을 받은 은행 대출을 바로 갚아야 하니 이를 위한 대출을 소개시켜주겠다' '내 계좌로 대출금을 입금하면 변제가 된다' '사건을 잘 아는 경찰, 검찰 출신 전관 변호사를 소개시켜 주겠다' 등의 방식으로 추가 편취를 한 뒤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을 들고 잠적하면서 2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피의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 일부 의사들은 경찰 수사를 지렛대로 추가적으로 금전을 갈취한 브로커들을 고소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을 대리하고 있는 박기태 법무법인 한중 변호사는 "'관행이어서 몰랐다' '사기라고 생각 못했다'는 항변만으로 혐의를 완전히 방어하기 어렵고, 허위 잔고로 대출을 받았다는 것 자체로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은 맞다"고 전제했다. 박 변호사는 "다만 고의성 여부와 자수한 뒤 수사 협조 정도, 문제의 신보 보증을 받아 일으킨 대출을 전액 상환한 경우라면 기소 여부에 참작할 요소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신보의 예비창업보증 제도의 허점이 브로커들과 전문직의 불법 행위에 장기간 악용돼 온 만큼 정책 금융의 지원 대상부터 그 기준과 관리까지 전반적인 재점검이 필요해보인다"고 짚었다.
신보는 예비창업보증을 둘러싼 사기 대출 범죄가 잇따르면서 지난해 1월부터 개편안을 마련해 적용 중이다. 신보 측은 "제도 악용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예비창업보증 한도사정 시 적용했던 자기자금 규모 기준을 폐지하고 창업 후 1년간의 추청매출액 기준으로 변경했으며, 의사 등 전문자격 창업에 대한 우대 혜택 비중과 기준도 축소·조정해 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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