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지하철 치한들을 움츠리게 만든 여성 [김종성의 '히, 스토리']
2026.05.03 18:56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한 뒤 협박 때문에 침묵하고 살았던 김부남은 그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분열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남성 기피증에 시달렸다. 그해 8월 16일, 전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판사가 "하고 싶은 얘기 없습니까?"라고 묻자, 김부남은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어요"라고 짤막하게 답했다(17일 자 <경향신문>).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제2회 수요집회(수요시위)가 열린 지 이틀 뒤인 1992년 1월 17일 오전 1시 반경이었다. 이때 제2의 김부남 사건이 발생했다. 열두 살 때부터 계부의 성폭행을 당한 21세 대학생 김보은이 남자 친구와 함께 가해자를 찔러 죽인 사건이었다.
지금의 '성폭력' 개념이 아니라 주로 '강간죄' 개념으로 성범죄를 처벌하던 시절이었다. 성폭행이 여성의 정조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적 자기결정권과 신체는 물론이고 남의 인생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인식도 보편화되지 않았다.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나무라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다.
김부남 사건과 김보은 사건은 그런 사회 풍조에 경종을 울렸다. 국민적 공분과 응원을 일으킨 두 사건은 우리 사회가 성범죄에 대한 전통적 통념에서 벗어나는 디딤돌이 됐다.
제도적 성숙 이루는 데 공헌
| ▲ 1994년 4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성폭력 특별법'오늘부터 발효 - 여성 추근대는 치한 '1년 징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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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긍정적 발전은 우리 사회 전체와 인권 운동가들의 참여 및 공헌에 힘입은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남다른 역할을 해낸 인물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92년에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어 제14대 국회에 들어간 이우정이 바로 그다. <자유의 종>을 쓴 소설가 이해조(1869~1927)의 손녀인 그는 우리 사회가 두 사건을 발판으로 제도적 성숙을 이루는 데 공헌했다.
그는 두 사건을 계기로 형성된 국민적 공감대를 국회 입법으로 연결시켰다.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 1994년 1월 5일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의 제정이다.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이 법은 성범죄 피해자의 보호에 주력했다. 또 성범죄에 대한 처벌 가능성도 넓혔다. 이 법 시행일에 발행된 그해 4월 1일 자 <동아일보>는 친고죄 조항에 대한 예외가 인정돼 "그동안 가족 내의 비밀로 묻혀 있었던 근친강간, 특히 미성년 자녀에 대한 강간을 제삼자의 고소로도 처벌할 수 있게 됐다"고 평했다. 또 직장 상사 등이 업무상 관계를 악용해 성추행하는 경우에 2년 이하 징역이나 5백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법의 의의라고 설명했다.
특별법은 성범죄의 개념도 확대시켰다. 위 기사는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여성들을 집적거리는 치한들", "전화나 컴퓨터 통신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말이나 영상을 띄우는 파렴치범들"도 피해자의 고소에 따라 범죄자로 처벌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는 이우정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민중여성들의 인권 획득에 기여하였고 오늘날의 여성운동에 대해 튼튼한 기초를 마련"했다면서 "특히 가족법 개정운동,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영유아보육법 제정운동을 이끌고, 성폭력특별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한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에 앞장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에서 1923년 8월 1일 출생한 이우정이 성폭력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대 후반 때의 시대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신학사상> 2021년 제194집에 실린 이유나 한신대 초빙교수의 논문 '이우정의 기독교 여성운동과 사회활동'은 "경기여고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딸이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혼사를 추진하였다"고 말한다. 이우정 본인은 그렇게 끌려가는 것도 싫고 억지로 결혼하는 것도 싫어서 가출을 결행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강제징용의 다른 말인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동원을 위안부 강제동원과 구분하지만, 과거의 한국인들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했다. 여성들이 일본에 의해 끌려갔다는 외형적 동일성에만 주목했던 것이다.
일례로, 1962년 광복절 전날 발행된 <경향신문>은 일제의 착취를 당한 여러 유형의 한국인들을 열거하는 대목에서 "정신대로 끌려가 남양(南洋)·중국 각처에서 일인 장교의 위안부 노릇을 하던 한국 처녀들"을 언급한다. 이우정이 가출을 하게 만든 정신대 강제연행은 위안부 강제연행이다.
이우정은 일제 국가권력의 성폭력인 위안부 강제연행을 혐오해 가출까지 단행했다. 이는 그가 성폭력특별법 제정에 앞장선 일은 물론이고 1990년대 초반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한·일본 연대활동에 참여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우정에게 공포심을 줬던 위안부 연행을 일본 정부나 한일 극우세력은 대수롭지 않게 치부한다. 자원 형식이었으니 강제 연행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위안소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고 신체가 폭행당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우정이 참여한 위안부 운동은 그런 인식들이 지배하던 현실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의 여성운동은 다른 형태들로도 전개됐다. 일례로, 현모양처를 추구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활동도 있었다. 위 논문의 한 대목이다
"이우정은 여대생의 장래희망이 80%가 현모양처로, 전문직에 종사하기보다는 안정적인 결혼을 원하는 1970년대 초반의 여성들의 직업과 결혼관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여성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사회 참여에 공헌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우정은 가사노동을 경시하여서는 안 되고, 남녀가 가사일에 협력하는 관계 설정을 하였다."
유신체제 몰락과 민주화에 기여
| ▲ 1994년 7월 14일 국회 여성특위 첫 전체회의에서 이우정 위원장(오른쪽)이 특위위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
| ⓒ 연합뉴스 |
여성문제와 관련된 부조리는 여타의 사회문제들과 뒤얽혀 있다. 그래서 이 운동은 다른 운동들과 공조할 수밖에 없다. 한신대와 캐나다 임마누엘대학에서 공부한 뒤 1953년에 한신대 교수가 된 이우정의 여성운동은 사회 전반의 부조리에 맞서는 운동들과 함께 전개됐다. 여성운동과 함께 인권운동·민주화투쟁·평화운동·통일운동·기독교운동을 함께 벌인 것은 그의 여성운동을 한층 깊이 있고 폭넓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에서 연달아 쫓겨났다. 1970년에는 모교인 한신대에서 해직됐고 1972년에는 서울여대에서 해직됐다. 또 중앙정보부도 드나들게 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박형규 목사 사이의 자금 전달 심부름을 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일주일간 구금됐다.
노동운동가이자 윤보선 부인인 공덕귀는 <여성·평화·생명: 이우정 선생 고희기념 논문>에 실린 '이우정 선생과 나'에서 자신이 남편을 대신해 이우정에게 자금 전달을 부탁했다면서 "우리들은 70~80년대 이 나라의 형극의 시대를 한마음 한 뜻으로 싸워왔다"고 회고했다.
이우정은 1976년 3·1절에는 명동성당에서 군정 종식과 민주 회복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 때문에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가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 그는 이런 운동을 통해 1979년의 유신체제 몰락과 1987년의 직선제 민주화에 기여한 뒤 1992년에 국회에서 성폭력특별법 제정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일궈냈다.
이우정은 김부남·김보은 같은 여성들의 처지를 우리 사회 전체가 공감하게 만들고 가해자들이 좀더 용이하게 처벌받도록 만들었다. 또 전철·버스 치한들을 언급한 위 <동아일보> 기사에도 나타나듯이 성범죄의 개념도 크게 확대시켰다. 그는 성범죄에 관한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과 대응 수단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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