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수건 짜내는데 탈모약까지, '재정 고갈' 외면한 대통령의 엇박자
2026.01.14 05:00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탈모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탈모인들로서는 환영할 만한 얘기겠지만, 정책적 관점에서 보면 대통령의 실무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실언이다.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요구를 파악한 '실용적 행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보건의료 정책의 큰 그림에서 보면 심각한 엇박자를 내고 있어서다.
현재 국내 제약시장과 건강보험 재정을 뒤흔들고 있는 핵심 쟁점은 '약가 인하'다.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마른수건을 짜내듯 약값을 깎아내려야 하는 시점에, 미용 영역인 탈모 치료에 재정을 투입하라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통령이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건강보험 악화, 고령화라는 상수(常數) 때문
우리나라 건강보험 재정의 건전성은 해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원인은 명확하다. 인구 구조의 고령화다. 의료 이용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통계적으로 노인 1인당 진료비는 일반 인구 대비 약 3배에 달한다. 노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의료비 지출이 기계적으로 폭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역대 정부는 의료비 증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윤석열 정부에서 강행했던 의대 정원 증원 정책 역시 공급 확대를 통해 의료비 상승을 억제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고, 신약의 건강보험 적용 여부 판단을 최대한 깐깐하게 진행해 약값을 낮추려는 기조 역시 같은 맥락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건강보험료율을 인상하는 것이겠지만, 이는 즉각적인 조세 저항을 불러오는 정치적 자살골에 가깝다. 결국 허리띠를 졸라매는 지출 통제 정책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최근 정부가 제약업계를 상대로 약가 인하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이런 절박한 재정 상황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약가제도 개편안의 핵심은 제네릭(복제약) 의약품의 약가 산정 비율을 현행 오리지널 대비 53.55%에서 40%대로 대폭 낮추는 것이다. 여기에 시장에서 실제 거래되는 가격을 반영해 약가를 조정하는 '시장 연동형 실거래가제'까지 도입하겠다는 방침이다.
제네릭 약값에 낀 거품을 걷어내 건강보험 재정 효율성을 높이고, 이렇게 절감한 재원으로 중증·희귀질환 치료제 같은 필수의료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구상이다. 필수의료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비효율적 지출 구조를 손보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제약바이오협회 등 5개 단체로 구성된 약업계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번 개편안이 시행될 경우 연간 매출 감소액이 최대 3조6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며 집단 반발에 나섰다. 국내 상위 100대 제약사의 평균 영업이익률이 4.8%에 불과한 상황에서, 조 단위의 매출 증발은 기업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업계 내부에서는 약가 인하 정책이 단행될 경우 인력을 10% 이상 감축해야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내 제약업계의 수익 악화가 미래 성장 동력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 제약사들은 제네릭 판매로 확보한 수익을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해 신약을 개발하는 선순환 구조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약가 인하로 자금이 마르면 R&D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들이 이번 정책을 두고 "신약 개발 사다리를 걷어차는 결정"이라고 반발하는 이유다. 단순히 복지 지출을 억제하는 차원을 넘어, 제약이라는 거대 산업의 향배를 가를 중대한 결정이 필요한 시점에 탈모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자는 한가한 얘기가 대통령 입에서 나온 셈이다.
약가 인하도 좋지만, '탈처방'은 왜 어려운가
노인들이 한 움큼씩 약을 복용하는 이유는 대부분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같은 만성질환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런 질환들은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병은 아니다. 혈압이나 혈당 수치를 관리하는 주된 목적은 10년, 20년 뒤 찾아올 수 있는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같은 심혈관계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기대여명이 수십 년 남은 50대나 60대에게는 필수적인 의약품이지만, 80대 후반에 접어든 후기 고령자에게도 과연 같은 기준이 적용돼야 할지는 의문이다. 90대 노인에게 인공지능 실업 위기 대응 교육을 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대여명이 제한적인 초고령 노인에게 10년 뒤의 예방을 위해 당장의 소화불량이나 어지러움을 감수하며 약을 복용하게 하는 것은 의학적 효용이 낮다. 오히려 과도한 약물 복용은 낙상이나 섬망 같은 부작용을 유발해 삶의 질을 떨어뜨릴 위험이 크다. 이미 서구권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노인의 기대여명과 삶의 질을 고려해 불필요한 약물을 줄여나가는 '탈처방' 논의가 활발하다. 무작정 약을 끊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근거에 따라 이득보다 해가 큰 약물을 선별적으로 중단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환자의 삶의 질이 개선될 뿐 아니라 불필요한 의료 지출도 줄어들어 개인과 사회 모두에 이익이 된다는 사실이 다수의 연구로 입증돼 있다.
국내에서도 노년내과를 중심으로 이러한 개념이 도입되고 있지만, 여전히 "약을 줘야 치료해 주는 것"이라는 환자들의 고정관념과 "약을 줄이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는 의료 현장의 방어적 태도가 맞물리며 확산 속도는 더디다. 여기에 노년내과를 대표하던 '스타 의사'의 몰락이라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그가 제기하던 문제의식마저 힘을 잃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약가 인하라는 공급자 쥐어짜기 방식 외에, 수요 측면에서 의학적 타당성에 기반해 지출을 효율화할 필요성은 여전히 크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 사회에는 차라리 이런 대책이 더 절실하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앞장서 불필요한 의약품 지출을 늘리자고 주문하는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공개 업무보고가 사실상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최근 관가에서는 '내란몰이' 분위기 속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대통령실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탈모 급여화를 언급한 이상, 보건복지부 관료들은 필수의료 지원이나 약가 구조 개혁보다 탈모약 보장성 강화에 행정력을 소모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대통령실에 필요한 것은 암과 같은 중증질환에 약가 지출을 집중하겠다는 선언이나, 국내 제약업계의 마진을 일정 수준 보장하는 대신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도록 유도하는 굵직한 정책 결단이다. 탈모약의 건강보험 적용 같은 사안이 아니다. 실용을 표방하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시급한지부터 구분하는 혜안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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