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더 펜’ 쥐고 프로듀서로 인생 새 챕터 쓴 제이민
2026.04.30 13:09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무대 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 온 배우 제이민(오지민)이 창작 뮤지컬 ‘더 펜’의 프로듀서 명함을 달고 기분 좋은 일탈을 시작했다.
가수로 출발해 어느덧 데뷔 15년을 훌쩍 넘긴 베테랑 뮤지컬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화려한 조명 아래서 노래하고 연기하던 그가 조용히 무대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이가 들었을 때 인생의 다른 챕터도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의 처음을 만들어 내는 일에 강한 매력을 느꼈거든요.” 5년 전부터 품어온 제작의 꿈은 그렇게 싹을 틔웠다.
시작은 부딪힘의 연속이었다. 무작정 여러 제작사 대표와 피디들을 찾아가 커피를 건네며 제작의 세계를 묻고 다녔다. 현재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왜 한걸음 뒤로 물러서려 하느냐며 따끔하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 한 10년 뒤에 하고 싶은 거예요’라며 웃어넘겼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그 타이밍이 훌쩍 일찍 온 겁니다.”
우연히 만난 텍스트 하나가 그의 마음을 단숨에 훔쳤다. 소설 ‘기억서점’으로 해외 19개국에 소개된 송유정 작가의 첫 뮤지컬 대본이었다. 제이민은 대본을 읽고 “글이 참 반짝반짝 빛나더라고요. ‘아, 지금인가 보다’ 싶었죠”라고 털어놨다.
신생 회사가 무난한 라이선스 대신 품이 많이 드는 창작 뮤지컬을 택한 이유를 묻자 유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라이선스 작품이 더 어렵지 않을까요. 신생 회사에 선뜻 판권을 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절반은 농담일 것이다. 진짜 이유는 오직 대본이 지닌 힘이었다. “회사를 차려놓고 작품을 찾은 게 아닙니다. 이 반짝이는 이야기라면 관객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덜컥 뛰어들거든요.”
4월 9일 SH아트홀에서 개막한 ‘더 펜’은 20세기 초반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삼는다. 남편의 억압으로 창작의 자유를 잃은 소설가 엠마와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사는 이름 없는 화가 제인이 소설 ‘별 비’를 함께 완성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이민은 “두 인물의 섬세하고 깊은 감정 교류가 깊게 와닿았어요. 큰 사건 없이 인간의 상처와 사랑을 다룬다는 점이 무척 좋았습니다”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작품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배우들도 탄탄하다. 소설가 엠마 역에는 문진아, 랑연, 임예진이 번갈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화가 제인 역은 장보람, 최수현, 정단비가 맡았다. 주영민 작곡가와 이기쁨 연출, 홍유선 안무가가 합류해 촘촘하고 완성도 높은 무대를 빚어냈다. 신생 회사의 창작진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특급 라인업이다.
회사 이름은 앤유컴퍼니로 정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동반자도 곁에 모셨다. 1980년대 히트곡 ‘그것은 인생’으로 국내 가요계의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 최혜영씨다. 어머니 최혜영씨가 대표를 맡고 제이민은 이사 직함을 달았다. 그는 “평생 저의 모든 무대 모니터를 어머니께 부탁드려 왔어요. 예술적인 심미안과 선구안이 대단히 뛰어난 분”이라며 굳은 믿음을 보였다.
칭찬에 인색한 어머니마저 대본을 보고 “글이 반짝반짝 빛난다”고 화답했을 때 벅찬 안도감을 느꼈단다. 제이민은 훌륭한 예술가인 어머니가 프로듀서나 연출을 경험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고 한다. 극 중 “당신의 문장들을 내게 줘요”, “나의 문장에 물감을 칠해줘”라는 가사처럼 낯선 길에 선 그에게도 어머니의 든든한 품이 필요했다. “저의 인생 뮤즈가 어머니라고 말씀드리면 많은 것들이 설명될 것 같은데요”라는 고백이 뭉클하다.
무대 위 배우와 밖의 제작자는 바라보는 방향이 같으면서도 다를 수 있다. 둘 다 경험한 제이민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배우가 이야기 속에서 홀로 내면과 싸우며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예술가라면, 제작자는 밖으로 모든 파트와 소통하며 뿌리를 뻗어나가는 사람이죠.” 결국 배우와 창작진이 좋은 이야기를 관객에게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튼튼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프로듀서의 진짜 몫이라는 얘기다.
신생 회사라서 겪을 수밖에 없는 마음고생이 그라고 없었을까. “신뢰도가 있는 대형 제작사라면 겪지 않을 설움도 마주했고 문득 자신감이 없어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처음이라서 더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았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동료들의 든든한 지지가 가장 큰 무기였다. 좋은 배우가 좋은 제작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배우로 활동하며 만난 모든 사람이 저의 보물입니다. 제가 첫 제작에 도전하겠다고 청했을 때 다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민이와 함께라면 난 할래’라며 뜻을 모아주셨어요.”
기꺼이 마음을 내어준 동료들을 보며 ‘적어도 배우로나 인간으로나 주변에 신뢰를 주며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하고 안도했단다. 이 대목에서 그는 좋은 배우와 제작자의 연결고리를 ‘선한 삶’에서 찾았다.
“개인적으로 배우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못된 마음이나 이기심 같은 안 좋은 것들이 제 눈과 연기를 통해 다 나타나거든요. 상대 배우와 눈을 맞추고 연기하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느껴집니다.”
배우는 자기 삶이 고스란히 무대에 묻어나는 무서운 직업인 것 같다. 제이민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초보 제작자이기에 자신을 좋은 제작자라고 부르기엔 아직 부족하다”며 몸을 낮췄다. 더 힘내서 정진하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제이민은 2000년대 초반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회사 특성상 댄스 트레이닝을 받았지만, 노래가 하고 싶어 춤 대신 기타를 배운 일화는 꽤 유명하다. 한국보다 앞서 일본에서 먼저 데뷔했고 일본 니혼대를 거쳐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외국어 능력도 탁월하다. 무대와의 인연은 2012년 뮤지컬 ‘잭 더 리퍼’로 맺었다.
가수와 배우 생활을 부지런히 병행하다 2016년 ‘헤드윅’을 기점으로 뮤지컬 배우 활동을 늘렸다. 그에게선 연예인 출신 무대 배우들에게서 종종 맡을 수 있는 특유의 기름 냄새가 없다. 그는 캐릭터에 흠뻑 스며드는 배우, 누구보다 무대에서 펄떡이며 놀 줄 아는 배우로 평가받아 왔다.
프로듀서 데뷔가 연기 인생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제이민은 “그럴 리가요. 저는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은 배우입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두 직업 모두 대단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앞으로는 스케줄을 더 꼼꼼하게 조율하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각오다.
만약 배우 제이민이 ‘더 펜’에 프로듀서가 아니라 배우로 뛴다면, 엠마와 제인 중 어느 역할이 더 어울릴까. “제이민이라는 사람은 엠마와 매우 닮아있거든요.” 제이민은 숨도 안 쉬고 엠마를 꼽았다.
“관객분들에게 내일을 살아갈 위로와 힘을 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배우로서 객석으로부터 듬뿍 받았던 긍정의 에너지를 이제는 무대 뒤에서 아낌없이 쏟아낼 차례다. 창작 뮤지컬 ‘더 펜’은 그 다부진 결심이 담긴 첫 번째 결과물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소설가와 원하는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화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는 과정은 제이민이 제작자로서 새롭게 써 내려갈 내일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기꺼이 서로의 물감이 되어주는 엠마와 제인의 아름다운 연대는 6월 29일까지 관객을 기다린다. 프로듀서라는 새로운 펜을 쥔 제이민의 이야기는 이제 막 기분 좋은 첫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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