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페르시아의 자비와 시온의 눈물
2026.04.30 07:00
평화는 선택이 아닌 인류 생존의 의무
이란과 이스라엘, 포용의 정신 회복해야
오늘날 중동의 화약고라 불리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대립은 마치 영원한 숙적처럼 보인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우리는 미사일 습격과 무고한 민간인들의 비명을 목도한다. 미국이 주도했던 선린과 평화의 국제질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이 전쟁의 실제 당사자인 이란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현재의 살벌한 풍경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인연'의 한 페이지를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과 역사가 증명하는 두 나라의 관계를 되짚어볼 때, 지금 벌어지는 참혹한 살육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비극이다.
성경 구약의 에스라(Ezra)서와 이사야(Isaiah)서를 보면, 이란의 전신인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2세) 대왕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군주였다. 유대인들에게 고레스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칭송받는 구원자였다.
이러한 우호 관계는 근대까지도 이어졌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이란은 터키에 이어 이슬람 국가 중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며 국가재건을 축하해 주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전까지 양국은 긴밀한 군사적·경제적 협력 파트너였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석유를 공급했고, 이스라엘은 이란의 농업과 군사 현대화를 도왔다. 한때 이들 양국은 중동에서 고립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러나 이념과 종교적 선전이 정치를 장악하면서, 과거의 동맹은 '악마화'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현재의 갈등은 민족 간의 뿌리 깊은 원한이라기보다, 정권의 생존과 패권 다툼을 위해 인위적으로 가공된 적대감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정치적 구호와는 무관한 '무고한 생명'들이다.
전쟁터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포성이 채울 때, 그 어떤 고귀한 명분도 빛을 잃는다. 이스라엘의 방공호에 숨은 노인이나, 이란의 거리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청년이나,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공포는 동일하다.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행위는 '국익'이나 '신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다.
성경적 가치와 역사의 교훈은 '복수'가 아닌 '화해와 공존'을 가르친다. 과거 페르시아가 유대인에게 베풀었던 자비는 힘의 정치가 아닌 인권과 존중의 정치였다. 만약 두 나라가 과거의 유대를 기억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면, 오늘날 중동의 지도는 피가 아닌 평화의 강이 흐르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은 승자 없는 게임이다. 파괴된 건물은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마음의 상처와 끊어진 생명의 가치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이 무고한 죽음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국제사회는 이란과 이스라엘이 정권의 이익을 위해 민간인을 방패막이로 삼는 행위를 엄중히 경고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적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다시 적이 되는 무상함을 보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는 단 하나다. "어떤 전쟁도 무고한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미사일의 궤적을 계산하는 정교함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는 공감의 능력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과거 고레스 대왕이 보여주었던 포용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무고한 민간인의 죽음 위에 세워진 승리는 수치스러운 패배일 뿐이다. 이제는 살육의 행진을 멈추고, 총구 뒤에 가려진 '인간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할 때다.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평화는 선택이 아닌 인류 생존의 의무다. 정훈진 법무법인 담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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