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100여 명 삶 구하고 떠난 럭비 국대…주중엔 용접공, 주말엔 무보수 코치였다
2026.04.29 04:31
전 럭비 국가대표 고(故) 윤태일(1983~2026)
편집자주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새벽 6시 반, 그날도 윤태일(43)은 집을 나서 조선소로 향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10년째 매일 같은 시간. 쉽사리 느슨해지지 못하는 성실함은 일종의 관성이었다. 열넷에 시작해 서른둘에 이르기까지, 19년간 럭비선수로 살았던 시간이 그의 몸에 남긴 흔적.
중학생 딸아이의 아침을 준비하던 태일의 아내 김미진(43)은 남편이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식탁으로 향했다. 어김없이 작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 "지수야, 아빠야. 오늘 겨울 방학식 하는 날이네?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다 와. 이따 저녁엔 아빠랑도 시간 보내자." 태일이 평소 일기처럼 남기는 짧은 편지다. 엉성한 글씨체를 바로잡아보겠다고 손아귀에 힘을 실어 꾹꾹 눌러쓴 흔적이 선연했다. 미진이 작게 웃었다.
태일이 아내에게 쓰는 편지는 대개 ‘미안해’로 시작해 ‘사랑해’로 끝났다. 살 맞대고 사는 부부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길어서였을까. 빚진 사람처럼 늘 용서를 구했다. 태일은 주말마다 유니폼과 운동화를 가득 채운 스포츠백을 메고 부산으로 향했다. 무보수로 한국해양대 럭비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올해로 벌써 11년째였다.
미진은 주말마다 집을 나서는 남편을 향해 좀처럼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라운드 위에서 럭비공을 들고 내달리던 시절의 태일이 얼마나 빛났는지 기억하니까. 그랬던 그가 11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나가 뛰게 해줘야 겨우 숨 붙이고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날 남편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중환자실을 지키던 미진은 후회에 잠겼다. ‘평생 그렇게 사랑했던 운동, 마지막까지 원없이 해봤더라면 한이라도 덜 남았을까.’ 가슴이 미어졌다.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의사는 장기기증 이야길 꺼냈다.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때 외동딸 지수(14)가 말했다. “엄마, 아빠는 운동장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잖아. 아빠의 일부가 아픈 사람들에게 가면 아빠 덕에 그 사람들이 운동장을 뛰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에 언젠가 태일이 넌지시 꺼내놨던 담담한 부탁이 떠올랐다. “우리도 나이 먹으면 아프게 되겠지. 진아, 연명치료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나는 지체하지 않고 떠나고 싶어. 가능하다면 남도 살리고 멋지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선택을 당신이 해 줘.”
운전 중엔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놀랄까 경적조차 쉽게 울리지 못할 정도로 다정했던 남편, 집에서 가장 큰 안방을 딸에게 내어줄 정도로 하나뿐인 자식을 목숨보다 아꼈던 아빠, 10년 동안 꾸준히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발군의 럭비선수, 2015년 삼성중공업 실업팀의 해체로 마지막 10년을 용접공으로 살았던 윤태일은 지난 1월 8일 퇴근길에 불법 유턴 차량과 충돌(운전자는 치사 혐의로 검찰 송치)해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다.
그로부터 엿새 후 심장, 간, 양쪽 신장을 4명에게, 인체 조직을 100여 명의 환자에게 기증하고 태일은 끝내 눈을 감았다. 향년 43세.
#1 소문난 쫄보, 오직 그라운드에서만 두려움을 잊었던
태일은 젊은 시절, 미진과 연애할 때부터 참 겁이 많았다. 바퀴벌레 한 마리 자기 손으로 못 잡는 건 그렇다 치자. 서른이 코앞인 성인 남자가 비행기 이륙할 때마다 옆 사람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런 ‘쫄보 중의 쫄보’가 오직 그라운드에서만 딴판이었다. 두려움 같은 건 태어날 때부터 모르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미진은 깨달았다. “평생 럭비를 안 하곤 못 살 사람이구나.”
현역의 태일은 어떤 선수였나. 그 시절, 그와 한 운동장에서 뛰었던 한건규(39)는 태일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증인이다. 연세대에서 1년, 국가대표팀에서 9년을 같이 뛰며 수많은 경기를 함께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잊을 수 없는 단 하나의 경기가 있었다.
“제가 연대 1학년, 형이 졸업반이었을 때 나간 2005년 정기 연고전이었어요. 그해는 고려대 선수들이 정말 셌거든요. 어떻게 해도 절대 못 이긴다는 예측이 많았죠.” 이미 기가 눌린 채 시작한 경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점수를 족족 내줬다. 후반전 종료 20분을 남겨놓은 시점, 내내 기회를 엿보던 10번 태일이 단숨에 상대팀 진영을 돌파했다. 럭비 경기의 꽃 '트라이(럭비 종목에서의 골 개념)'를 찍으며 스코어를 반전시켰다. ‘저 형은 혼자서도 경기의 흐름을 바꿀 줄 아는구나.’ 남 몰래 감탄했다. 그해 연대는 4년 만에 고대를 꺾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처음 태일을 봤을 때만 해도 '경기 감각 하나는 타고났구나' 싶었다. 오랜 시간 지켜보니 틀린 생각이었다. 끈질긴 공부로 벼린 실력이었다. “경기 전 미팅 때마다 상대 팀 공격스타일부터 선수별 강점과 약점, 자주 사용하는 플레이 패턴까지 모조리 분석해왔어요. 영상을 하나하나씩 돌려보면서 공부를 해 온 거죠.”
후배 건규는 태일을 '가장 빠르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지치지 않던 선수'로 기억한다. 아직도 태일을 생각하면, 남들보다 더 많이 젖어있던 스파이크(럭비용 축구화)가 떠오른다.
#2 "형, 럭비 그거 내도 해볼란다"
운동에 대한 집념,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여섯 살 위의 형 태민(49)이었다.
태일은 1983년 경북 영주에서 삼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광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태백으로 건너가 탄광촌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태일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다리를 크게 다치며 외가가 있는 경산으로 이사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형이 럭비를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형, 럭비는 어떻게 하는 거야.” 1991년, 형 태민이 대통령기 전국 럭비대회에서 우승했던 해였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형이 경산 시내를 개선장군처럼 행진하던 모습이 고작 여덟 살의 눈에도 근사해 보였나 보다. 대뜸 럭비를 알려달라 들었다. 태민은 베개를 럭비공 삼아 들고 침대 위에서 동생에게 시범을 보였다. “마, 한번 달려와 봐라, 형한테 세게 부딪혀 본나.” 꼬맹이의 가슴 한편에서 ‘언젠가 형처럼 되고 싶다’는 꿈이 자라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된 태민은 모교(경산중) 코치로부터 동생의 칭찬을 들었다. "키도 큰데, 농구도 축구도 다 잘하는 데다 공부도 곧잘 한다. 럭비 할 싹이 보이는데 니가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느냐"는 얘기였다.
몰래 동생을 불러다 놓고 조용히 물었다. “태일아, 형이 하는 운동 니도 해보고 싶나. 이거 억수로 힘들다. 형도 맨날 피 흘리면서 운동한다. 그래도 해보고 싶나.” 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 내 힘들어도 꼭 해보고 싶다.” 태일은 그렇게 럭비를 시작했다.
지금처럼 영상 자료가 풍부하지도 않았던 그 시절에, 태일은 꼬박꼬박 경기 중계를 찾아보고 자신만의 전략을 세워 경기를 풀어냈다. 또래 친구들은 감독의 지시만으로도 허덕거릴 때였다. 동생을 지켜보는 형의 가슴도 덩달아 뛰었다. "어쩌면 내 동생은 나보다 훨씬 더 큰 선수가 되겠구나, 그때 예감했던 거 같아요."
#3 유니폼을 벗고 용접공으로
그러나 겨우 13년 남짓이었다. 태일이 현역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시간은. 경산중고, 연세대를 거쳐 삼성중공업 실업팀에 들어가기까지 그의 선수 인생을 내내 곁에서 함께했던 이규득(42)은 그게 못내 안타까웠다. “럭비를 그렇게 좋아했던 놈인데... 짧아도 너무 짧았십니더.”
2015년, 삼성중공업 구단이 해체됐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그는 2014년 인천 대회에도 팀의 캡틴(주장)으로 출전해 같은 색깔 메달을 따내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날벼락 같은 통보였다.
규득은 떠올린다. “제가 본 태일이는 삼성에서 뛸 때 가장 행복해했어요.” 자신의 남은 럭비 인생을 바칠 팀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엔 이 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도 꿨다.
당장 제 처자식 먹여 살릴 방도가 안 보이는 마당에 그는 후배들에게 술부터 샀다. 입단한 지 1년도 채 안 지난 막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술잔을 가득 채워주며 장담했다. ‘형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테니, 괜히 나쁜 생각은 하지 마.’ 당시 태일의 나이도 고작 서른둘이었다.
이적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라는 곳도 적지 않았다. 아내 미진은 말했다. “태일아,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네가 행복해야 나도 지수도 행복하니까.” 아버지와 형의 생각은 달랐다. “가장이라 카면 처자식 생각부터 해야 안 되나. 럭비 같은 비인기 종목 한다 카면서 밖에 나가 지도자 한다고 먹고사는 게 그라고 쉽나. 지금이라도 기술 하나 배워서 꼬박꼬박 월급 타묵고 사는 기 더 낫지 않겠나.” 형 태민은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나는 운동하던 시절이 너무 힘들어가, 그만두고 나서는 한 번도 뒤돌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근데 태일이는 그기 아니었던 거라. 이렇게 빨리 떠날 줄 알았으면, 그때 말리지 말걸.”
우여곡절 끝에 선수들 대부분이 거제에 있는 삼성중공업 조선소에 보내졌지만, 진짜 고생길은 그때부터였다. 용접일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됐다. 하필 그가 배치된 곳은 베테랑들조차 몸이 힘들다고 기피하는 부서였다. 선박 건설 현장에선 종일 금속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도 연대 나온 놈이 타 주는 커피 한번 마셔보자”는 동료들의 비아냥거림은 차라리 견딜 만했다. 태일에게 가장 힘들었던 건 이젠 더 이상 ‘돌아갈 구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끝내 조선소에 적응하지 못한 후배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하루는 태일이 우스갯소리 삼아 미진에게 말했다. “누가 말 시키는 게 싫어가, 하루 종일 음악도 안 나오는 이어폰 꽂고 있다.” 그렇게 사람 좋아하던 사람이, 누가 말 시키는 게 싫어 귀를 막고 지낸다니, 미진은 그 말이 두고두고 아팠다.
#4 "럭비가 좋은 것보다 태일이 형이 좋았지"
“기본만 제대로 해도 절대 지지 않아.” 선수 시절 그가 팀원들에게 습관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그가 삶이란 경기에 임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태일은 럭비라는 꿈을 끝내 좌절된 상처로 남기지 않았다. '낙천성'이야말로 그가 섬기던 기본기였으니까.
구단이 해체된 후 1년쯤 지났을 무렵, 태일은 한국해양대에서 무급 코치 일을 시작했다. 규득은 그게 ‘지극히 그다운 선택’이라 생각했다. “저는 럭비를 17년이나 하고 나니까, 이제는 운동이라 카면 지긋지긋하더랍니다. 할 만큼 했다 싶었거든요. 태일이는 달랐습니다. 럭비를 좋아하는 데 있어서는 한 번도 지친 적이 없던 기라예.” 해양대에 따라가서 본 태일의 모습에선 오랜만에 생기가 느껴졌다. 마음이 놓였다.
태일은 열 살 넘게 어린 제자들에게 체력으로 밀릴 수 없다며 밤마다 집 근처 공원을 수십 바퀴씩 뛰고 들어왔다. 아내 미진은 그런 남편의 모습이 다행스러웠다. 태일이 기어코 ‘자신답게 살기 위한 뭔가’를 하기 시작한 것 같아서. 무급 코치 생활을 7년쯤 했을 때부턴가. 태일은 새로운 꿈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우리 딸이 어엿한 성인이 되면, 그때는 꼭 럭비 지도자로 살고 싶다고. 제자들을 때론 친동생처럼 때론 자식처럼 살갑게 보살폈다. 언제나 '감독님' 같은 깍듯한 호칭이 아닌 '형'으로 불리길 원했다.
태일이 해양대에서 가르쳤던 첫 제자 김형규(31)는 자신이 직장인이 되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밥벌이란 게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그토록 고단한 노동과 코칭을 병행해온 태일은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를.
“그땐 국가대표 출신이 우리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막연히 신기하기만 했는데…. 제가 사회에 나오고 보니 형이 더 존경스럽더라고요. 형은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파워포인트 자료를 빼곡하게 만들어오셨어요. 세트플레이(공격 패턴), 포메이션(선수 배치) 전략은 물론 상대 팀 선수들의 체격과 경기 습관까지 꼼꼼하게 분석한 자료였죠. 저희를 엘리트 선수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하신 거예요.”
도대체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샘솟았던 걸까. 거제에서 부산까지 오가는 교통비며 숙소비까지 모두 자기 지갑 털어가며 하던 일인데. 처음엔 경외감이 들었다가, 나중엔 먹먹해졌다. 형이 진심으로 우릴 아꼈던 거구나 싶어서.
그래서였다. 졸업한 지가 이미 한참 전이지만 럭비부 OB전이 열릴 때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려간 것은. “럭비가 좋아서도 있지만, 태일이 형이 보고 싶어서 가는 거였어요. 아마 저뿐 아니라 다들 그랬을걸요.”
제자 박형주(23)는 요즘 들어 태일이 보내오던 뚱뚱한 문자들이 아른거린다. 그는 누군가를 혼낸 날이면, 구구절절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가 아까 한 말은 너무 오래 담아두지 말라’면서. 혼날 만해서 혼났을 뿐인데도 그렇게나 미안해했다. 맛있는 거 먹고 얼른 기운 차리라며 기프티콘까지 같이 날아오면 괜히 쑥스럽고 부끄러워졌다.
자기 몸은 마구 굴려도 선수들 몸은 끔찍하게 아꼈다. 체력 훈련을 짤 때면, 제자들에게 시키기 전에 자신이 먼저 운동장에 나와 직접 뛰어봤다. 자기 몸에도 견딜 만해야, 제자들의 몸 상태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단 판단에서였다. 그런 다정함이 오롯이 전해졌던 걸까.
"'다음 주말엔 태일이 형 오신단다' 공지하면 다들 기를 쓰고 운동을 나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냥 럭비가 좋았던 것 보다 태일이 형이 좋았던 거 같아요."
지금도 모이면 그 얘기다. “태일이 형 보고 싶네.” 그런데 이젠 어디로도 그를 보러 갈 수가 없다.
#5 마지막 패스
태일의 장례식장은 3일 내내 북새통이었다. 진을 치고서 종일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들만 수십 명이었다. 입관식만 두 번 했다. 태일의 마지막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든 탓이었다.
건규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과언이 아니고, 대한민국 럭비인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왔더라고요. 조문을 하는데 일렬로 줄을 서야 할 정도였어요.” 나중엔 사람이 너무 넘쳐서 옆방까지 빌렸다. 그뿐일까. 바다 건너 먼 이국땅에서 8시간을 날아와 발인 직전에 겨우 도착한 친구도 있었다.
그중 하루는 고대 럭비부 점퍼를 입은 스무 살 남짓한 남자애들 여럿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3년 전 태일이 청소년 대표팀 전지훈련에 참여했을 때, 겨우 한 달 가르친 아이들이었다. 한 달 스승도 스승이라고 서울에서 거제까지 왕복 9시간 거리를 내려온 거였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들이 스무 살 무렵의 태일과 비슷했다. 그들은 홀쭉해진 각자의 주머니에서 만 원씩 모아 조의금을 냈다. 서울에서 거제까지 오가는 버스비만 10만 원은 족히 썼을 터였다. 남자애들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이만큼밖에 내지 못해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진씨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3일 내내 밀려드는 인파에 놀라면서도 미진은 ‘참 태일다운 장례식’이라 생각했다. ‘평생 남들에게 뿌린 다정함의 온기가, 당신이 떠난 자리로도 돌아왔구나’ 싶어서.
언젠가의 장례식장 풍경이 떠올랐다. 미진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지수 아빠가 시합을 마치고 뒤늦게 장례식장에 왔어요. 검은 봉지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외할머니 영정 사진 앞에 올리는데 백도 복숭아더라고요. 외할머니가 생전 가장 좋아하셨던 과일이었어요. 한참을 울었어요. 우리 가족들 중에 아무도 기억 못 한 걸 태일이 혼자 떠올렸던 거예요. 저는 흉내 내보려 해도 비슷하게조차 따라 할 수가 없더라고요. 태일이의 그런 다정함은.”
장례식장이 온통 그 다정함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 천지였다. “그래서 저는 지수가 커갈수록 태일이를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어요.”
럭비는 공을 앞이 아닌 뒤로 패스하는 거의 유일한 구기종목이다. 뒤에서 그 공을 건네받은 사람이 앞으로 달려야만 비로소 경기가 나아간다. 태일이 떠나며 기증한 장기는 네 명의 생명을 살렸다. 마지막 순간조차 그가 평생 사랑했던 럭비의 룰을 따랐던 셈이다.
떠난 사람의 몫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해지는 것은, 그가 패스한 공을 이어받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의 29년 지기 규득과 럭비단 출신 조선소 동료들은 지난 3월 태일을 대신해 해양대를 찾았다. 태일의 생전 제자였던 재학생 한 명이 규득에게 다가왔다. “형님께서 태일이 형님처럼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신이 태일의 몫을 다할 순 없다는 걸 잘 안다. 대신 약속했다. “지킬 말만 할게. 힘닿는 한 꼭 올 거야.”
태일이 떠난 후, 도통 잠을 못 자는 미진은 오늘도 깊이 잠들 날을 기다린다. 딸의 꿈에도, 장모의 꿈에도, 친구들의 꿈에도 다녀갔다는 태일이 자신의 꿈에만 오지 않은 게, 다 자신이 깊이 잠들지 못한 탓인 것 같아서.
“지수 아빠, 내 꿈엔 왜 안 와주는 거야. 얼마나 대단한 로또 당첨 번호를 들고 오려고 그래?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꼭 와줘. 꿈에서라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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