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먹힌 노동’ 없는 그날…‘모두의 노동절’을 기다리며
2026.04.27 19:48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누구도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노동절을 강조하는 고용노동부의 광고가 흐른다. 올해부터 5월1일 노동절이 제대로 의미를 되찾아 국가 지정 공휴일이 되었다. 하루만 휴가를 쓰면 닷새를 놀 수 있는 달력이다. 계절은 푸르고 관광지는 특수를 기대한다. 안타까운 건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 어떤 이들에게는 더 춥게 느껴질 그늘이다.
대통령이 그 그늘을 살피는 듯하다. 취임 후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건설 현장의 고질적인 하도급 대금 미지급 문제를 언급했다. 곧이어 임금 체불 엄단과 전수조사를 지시했고, 지난달엔 발주자 직접 지급제와 그 제도화를 다시 한번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전자대금지급 시스템 사용과 1천만원 이하 소액 공사를 뺀 건설 하도급 거래에서 지급 보증을 의무화해 가는 중이라고 한다. 또한 건설사가 공사대금 가운데 임금을 유용할 수 없게 별도 관리하는 임금구분 지급제를 도입하여 노동자 계좌에 직접 넣도록 정비하는 중이라고도 한다. ‘건설산업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내놓아 임금을 안 주면 더 큰 손해가 발생하도록 하는 사후관리도 예고했다. 그동안 정규직의 바깥, 불법파견이나 다단계 하도급에서 노동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한 구조적 착취가 일어나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아무도 고치려 들지 않았던 터였다.
거의 평생 건설 하청 일을 하며 걸핏하면 임금을 떼먹힌 노동자의 가족으로서 국무회의 장면을 보며 잠시 울컥했다. 이제 적어도 일하고 돈 못 받는 노동만이라도 없어질까?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님께 호소드립니다’ 하는 일간지 전면광고가 눈에 띈 적 있었다. ‘전국 200만 일용직 노동자’, ‘사단법인 전국고용서비스협회’가 공동명의로 게재한 광고였다. 광고에서는 정부 정책을 환영하면서도 일당을 받아야 생활이 가능한 노동자의 경우와 고용서비스협회의 불가분 관계를 설명하며 더 세밀한 조치를 원하고 있었다. 그 광고에 대해 청년 시절 대기업에서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평생 비정규 단기 기간제 노동을 해 온 ㄱ씨는 이렇게 말했다.
“고용서비스업체를 일반적으로는 용역사무소, 줄여서 용역이라 부른다. 이곳에서는 찾아오는 노동자들을 하루라도 더 일하게 해주어야 자기들에게도 이득이니 최선을 다한다. 그 대가로 법규와 상관없이 일당에서 10%의 수수료를 떼는데, 용역사무소 초기부터 노동자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해 온 관례다. 더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발주처인 건축주나 땅 주인이 공사를 시작할 때 입찰을 통해 맡은 시공사를 원청, 1군이라고 한다. 대체로 대기업이다. 1군이 입찰을 통해 공사할 2군을 선정한다. 대기업에 선정된 2군 업체가 용역사무소에 연락해 ‘잡부 몇명 보내주시오’ 또는 ‘○○기술자 몇명 보내주시오’ 해서 노동자를 충원한 뒤 한달을 기준으로 용역사무소에 충원한 노동자들 임금을 지급한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용역사무소로부터 수수료를 공제한 선지급으로 받는다. 당일 받겠다, 나는 주급으로 받겠다, 찔끔찔끔 받아봐야 자투리로 없어지니 월급으로 달라, 요청도 다양하다.
문제는 용역사무소가 이미 지급한 임금을 2군 업체에서 못 받는 경우가 발생한다. 2군이 불성실하거나 부도나는 경우다. 그 빚 받으려고 용역업체가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경우가 심심찮다. 노동자와 용역업체 모두가 건설시장의 불안정한 ‘을’과 ‘병’이 되어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당부대로 발주처가 노동자에게 직접 지급하게 되면 임금이 밀리거나 잘리는 일은 방지된다. 용역은 10% 수수료 받는 게 어려울 수는 있다. 노동자가 수수료를 내지 않고 떠나버릴 수도 있다. 광고 내용대로 하루 일거리를 찾는 사람 중에는 신용불량이나 가계 파탄으로 계좌가 압류된 이도 많다. 이 경우엔 ‘압류방지계좌’나 ‘노무비전용계좌’ 같은 대용 계좌를 쓸 수 있게 정부가 조치해 주면 된다. 현찰로 받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때는 기록의 미비로 인한 산재 처리 위험성 등을 방지할 보완책이 필요할 것이다.”
ㄱ씨는 1980년대 직업훈련소를 수료하고 스무살에 대기업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1987년 전국노동자대투쟁의 현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구속되고 해고되었다. 그가 일했던 중공업은 많은 희생을 거치며 노동조합 정상화를 이루어 갔다. 해고자들과 함께 복직 투쟁하는 동안 생계를 위해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낮에는 노조 업무를 지원했다. 노조에서는 차용 형태로 기본급 정도의 인건비를 지급해 주었다.
몇년 뒤 법원에서 이들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이 떨어졌지만, 회사는 복직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최종 협상을 통해 해직 기간의 임금을 받고 계열사 소규모 업체에 입사하는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시불로 받은 임금은 그간 노동조합에서 보조한 생활비를 갚는 데 모두 쓰였다.
그들이 떠난 중공업은 그동안 여러 젊은 노동자의 죽음과 구속, 해고를 겪었으나 1987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조건을 획득했다. 하지만 떠나야 했던 이들은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새 직장에서 일해야 했고, 임금이나 상여금 복지 등에서 비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는 똘망똘망 자라나는데 생활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래가 불안해 ㄱ씨는 장사를 시작했으나 자리 잡힐 만하니 외환위기가 닥쳤다. 버텨낼 힘이 없었다. 식구들을 두고 홀로 도시의 공사판으로 향했다. 그렇게 1990년대 막바지부터 시작한 비정규직 단기 계약, 이름 지어지지 않는 노동을 흰머리가 덮일 때까지 해왔다. 한곳의 일이 끝날 때마다 길게는 몇개월씩도 공백이 떴다. 공과금이나 은행 대출은 하루만 지연해도 연체이자가 발생하는데, 고질적인 임금체불은 그 무엇도 계획하고 설계하기 어렵게 했다. 말이 좋아서 노동법이니 권리 찾기지,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일자리는 연쇄로 끊어지고 만다. 한때는 대기업의 노동자로 깃발을 들었으나 아이의 눈망울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들은 이미 숙련공이었거나 훌륭한 숙련공이 되었지만, 평생 신규 ‘용역 잡부’로, 잘리고 떼인다. 새벽같이 출근해 땡볕이나 혹한의 바깥일을 하며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남들은 손꼽아 기다리는 공휴일, 명절까지 다 무급이다. 야근수당은 언감생심, 상여금이나 노동절 근무 2.5배도 딴 나라 이야기다.
그는 언젠가 한 대기업 노동조합이 단체협약 조항에 자녀 취업을 승계하는 안을 넣어 논란이 되는 것을 보며 실소했다고 말한다. 노동운동의 결실을 딛고 선 후배 노동자들이 일종의 기득권을 취하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현장에서 ㄱ씨들이 꿈꾸었던 건 정의로운 노동, 공정한 분배였다.
열악한 일을 하거나 저임금 노동자일수록 부당한 일은 더 많이 겪는다. 비용으로만 처리될 뿐인 노동자들을 호명한 대통령의 시선이 끝까지 흐려지지 않기를, 노동절이 진정 ‘모두의 노동절’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우리 사회가 ‘잡부’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 ‘○○기술자’로 바르게 호명하면 좋겠다. 아울러 최근 활동을 시작한 ‘이주노동자 이름 부르기 운동’을 응원하며 “야, 태국!” “야, 베트남!”이 아닌 진짜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면 좋겠다. 이름은 곧 자존감이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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