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4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2026.04.28 02:01
4월 독회 추천작은 이유리 장편소설 ‘구름 사람들’(문학동네)과 최재영 장편소설 ‘인류 2호’(민음사)입니다. 최재영의 작품은 지난 1월 출간작이지만, 여러 작품과 경합한 끝에 한 달 늦게 본심에 합류했습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구름 사람들
하늘로 올라간 구룡마을
이유리의 『구름 사람들』(문학동네, 2026.02)은 한국 사회에서 산업화 이후 꾸준히 문제가 되었던 빈민촌의 실태를 알레고리적으로 기술한 소설이다. 알레고리의 구도는 아주 명백하기 때문에, 이것의 전도된 배치는 충격적이기보다는 기이한 느낌을 준다. 빈민촌을 구름 위로 올려놓았는데, 이 구름은 “정확히 뭔진 몰라도 아무튼 몸에 더럽게 나쁘다는 유독 물질이 허공에 엉겨붙어 만들어진”(p.10) 것이다.
이 구도는 한국 사회의 공간적 비균질성이 내포한 차별적 질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이것이 기이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비판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전도의 이유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하층을 상층으로 뒤집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풍자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다시 읽으면 빈민층을 ‘악’으로 여기려는 은근한 충동을 즐기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를 가리키기 위해서, 라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지상의 사람들은 구름 사람들에게 분노하는데, 왜냐하면 구름 사람들이 햇빛을 가려서 지상인들의 일조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만일 정상적으로 묘사한다면, 빈민층의 현실은 자연적 질서 속에 속하게 된다. 즉 비지각적인 사항이 된다. 빈민층의 가난은 그들의 본래적 운명이 되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모종의 타당한 이유를 전제로 갖게 된다.
상하를 뒤집어 놓음으로써 작가는 그런 자연성을 깨뜨리고 자각적이고 의심스러운 상황으로 만들어버린다. 지상인들의 원망을 정당화하려면 ‘구름 마을’(=‘구름 사람들’이 사는 마을; 독자는 이 숨겨진 명칭을 통해서, 이 소설이 ‘구룡마을’을 제재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다)의 존재가 ‘구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거기는 지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연유로 지상인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놓인 것일까? 거기에 지상인들의 책임은 없는가? 등등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상인들의 일조권은 당연히 ‘하늘’과 ‘태양’이 존재해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하늘’은 ‘구름 마을’에 사는 한 인물의 이름으로 전이된다. 실제의 ‘하늘’이 지시되기는 하지만 단 한 번(p.176)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태양’은 “성실한 초침처럼 움직”(p.148)이는, “구름 사람들의 얼굴과 목덜미[를] 항상 새까맣”게 만드는 무자비한 내려쬐임(p.75)일 뿐이다. 지상에서도 햇빛은 “정수리를 찔러댄다”(p.106.) “부드러운 햇빛”(p.65)은 관념 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태양은 그저 잔혹한 형벌 기계일 뿐이며, 그 태양을 품고 있는 하늘은 ‘존재의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해서 ‘하늘’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오하늘’의 이름으로 옮겨진다. 실체가 없는 이름만의 존재. 이러한 존재는 흔히 특별한 ‘상징’으로 작동한다. 상징은 실체에 대한 갈망이며 따라서 욕망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다. ‘구름 마을’의 거주인 ‘오하늘’ 역시 그러한 열망 속에서 탄생한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전개는 그러한 상징의 완벽한 추락과 변질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소설의 결정적인 미학적 동인이다.
가령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의 장편소설 『아름다운 패배자들(Beautiful Losers)』(1966년 작)과 비교해보자. 레너드 코언에게 ‘캐나다의 제임스 조이스’라는 명칭을 붙여준 계기가 되었던 이 작품은 코언의 히피 문화적 감수성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화자의 친구인 ‘F’가 ‘나’의 삶에 의미를 불어넣어주는 인물이다. ‘F’는 정신병으로 죽었으며, 죽기 직전에 ‘나’에게 이상한 편지를 보냈는데, 따라서 ‘나’에게 ‘F’는 이름과 편지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F’의 편지가 들려주는 기괴한 성적 일화, 테러 행위와 더불어, “신은 살아 있다. 마법은 깨어 있다(God is alive. Magic is afoot)”라는 유명한 신비주의적 시편을 통해 “순수한 ‘마법’이자 신성한 존재가 될 것을 주문”한다. ‘나’는 이에 적극 호응하여, 그의 권유대로 “아름다운 패배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군중과 경찰 앞에서 늙은 몸을 서서히 해체하고, 대중문화의 우상인 맹인 가수 ‘레이 찰스(Ray Charles)’의 흑백 영화 영상으로 다시 조립되는 초현실적인 기적(마법)을 선보인다.
망가진 세속을 환몽적 종교성으로 바꾸는 이 기이한 변신의 극에 트리거를 당기는 게 존재하지 않는 자, ‘F’의 상징성이다. 『구름 사람들』의 ‘오하늘’의 이름에도 이 비슷한 상징성이 의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가지 않고 거꾸로 간다. 그는 지상의 언론인, ‘김노을’이 출세를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교묘한 간계를 역이용하여 돈을 끌어모으고, 지상의 햇빛 잘 드는 오피스텔에 정착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마의 도주, 아버지의 구속, 동생의 사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이다. 이 모든 것을 대가로 오하늘은 지상의 기만적인 자본 시스템에 편입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하늘’이라는 이름은 ‘하늘은 없다’는 사실에 직면케 하는 소설이다. 또한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이 곧바로 상기시키는 문화적 메시지, 존 레넌의 「이매진」이 희망했던 자유롭고 평등한 교류를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철저한 약육강식과 허위와 이용과 계산이라는 지상 법칙의 절대적인 위력을 절감케 한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알레고리의 의장을 입은 철저한 리얼리즘 소설이다. 하지만 이 리얼리즘은 ‘구름 사람들’의 실상에 천착하지 않고 그것의 ‘후과’를 보여줌으로써 그 원인을 진하게 궁금케 하는 특이한 리얼리즘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후성유전학’의 용어를 차용해 ‘후성사실주의(後成寫實主義)’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리라. 『구름 사람들』은 새로운 장르의 출현을 예고한다. 물론 그 인식적·미적 성취에 대해서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인류 2호
‘인간 너머’라는 이름의 루프에서 탈출하기
최재영의 『인류2호』(민음사, 2026.01)는 난데없이 출몰한 새로운 인간을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씩씩한 모험처럼 펼쳐 보이고 있는 소설이다. 이 새로운 인간, ‘감자원숭이’라고 불렸던 ‘나’의 출생 배경은 없다. 그는 「요한시집」(장용학)의 토끼처럼 동굴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우연히 조난당한 사육사와 만나면서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그의 과거는 소설 속에 없다.
인간과 닮았지만 왜소하고 기형적인 형상인 데다 수명이 18년에 불과한 이 인물은 DNA 검사 결과 인간과 다른 새로운 ‘사람속’으로 밝혀지면서, 일약 유명해지며, “살아 있는 화석. 인간과 유사한 지적 능력을 지닌 초유의 유인원. 어쩌면 인간 진화의 비밀을 품고 있을지도 모를 유일무이한 표본”(p.30)으로 조명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살게 된 곳이 동물원이다.
동물원?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매우 희롱적인, 하지만 풍자적이라기보다는 골계적인 설정이다. 이 거주지의 지정에는 이유가 있다. 그와 최초로 만났던 사육사와의 애착 관계가 그를 사육사의 직장에서 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를 인간들의 신기한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
이 설정은 “인간만이 타자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레비나스)는 인간의 자기만족적 긍지를 과장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내부에 차별을 생성하고 즐기는 원리를 폭로한다.
이 최초의 단서는 이 소설의 ‘존재 이유’이다. 짐작컨대 두 편의 영화,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과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런너」(1982)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두 영화가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히 보여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지적 생명의 가능성에 대한 타진을 주제적으로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두 작품을 가두고 있는 모종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보인다.
즉 「엘리펀트 맨」이 내부 편 가르기와 타자에 대한 폭력을 쾌락과 진화의 동력으로 삼아 온 인류의 체질화된 태도를 비판한다면, 「블레이드 런너」는 AI에게서 인간보다 더 높은 윤리적 감각을 찾아내는 논리적 통로를 모색했다면, 어쨌든 이 두 작품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리우며 ‘디스토피아 풍’ 우울 속을 자맥질한다.
반면 『인류 2호』는 주인공의 애처로운 경험들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인간 그 자신에 의한 ‘환골탈태’에 대한 소망에 꾸준한 훈김을 불어넣으려 애쓰고 있다. 그 점에 대한 최초의 단서가 신인류로 대접받는 주인공이 거주할 처소의 모순적 이중성으로, 이 모호성이 주인공의 생에 대한 의욕과 모험이 전개될 발판이 된다는 점이다.
이 모험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주인공의 유전자가 ‘ARHGAP11B’라는 특이 유전자의 변형(돌연변이)”이라는 점이다. 이는 이중의 고리를 집어넣은 논리적 곡예이다. 왜냐하면 ‘ARHGAP11B’라는 유전자 자체가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가 다른 유인원과 달리 만물의 영장이라 불릴 만큼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끔 한 결정적인 원인”으로서, “대뇌 신피질을 확장”시켜 “뇌에 수많은 주름을 만들어낸”(p.246)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여타의 동물과 구별된 것은 바로 이 유전자 덕분인데, ‘인류 2호’인 주인공의 유전자는 그 유전자의 돌연변이로서의 변형 유전자이다.
요컨대 주인공은 인간과 다른 ‘속’이 아니라, 인간의 돌연변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과거가 말소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 구성적 타당성을 갖는다. 그는 인간과 다른 별종이 아니라는 풀이가 성립된다. 그리고 이 돌연변이의 결과로 주인공은 괴상한 외모를 갖는 대가로, 인간의 ‘직선적’ 사고와 달리, “돼지꼬랑지”(p.248)와 같은 특별한 사고를 함으로써 “치매를 정복할 수 있는”(p.250) “기적의 씨앗”을 품게 된다. 이로써 주인공의 처지는 인류의 희망으로까지 격상하면서, 그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는 주인공의 모험이 개시되는 바, 이 모험은 “호모쇼”(프릭쇼)와 같은 비참한 시련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조차도 자발성의 둥근 공기를 가득 품고 전개된다.
결국 ‘인류2호’의 주인공의 목표는, 그가 정복할 수 있다고 가정된 ‘치매’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임을 잊게 만드는 비극적인 불치병”(p.250)이라고 정의되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류의 새로운 진화이다. 작가는 그 목표에 논리와 실행 형식을 부여하였다. 그것이 지금까지 씌어진 수많은 ‘사이파이’ 작품들로부터 이 작품을 변별시키는 실마리다. 다만 서양 철학을 조금 읽어 본 사람이라면 곧바로 들뢰즈의 ‘리좀’적 사고를 연상하게 될 ‘돼지꼬랑지 식’ 사고가 실제로 어떤 추론의 굴곡을 가지게 될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주인공이 맞게 되는 시련들의 연속이 두드러진다. 이 시련들이 매우 직선적으로 비치지 않으려면 돼지꼬랑지가 더욱 세차게 꿈틀대야 하리라. 그럴 때 소설은 언제나 ‘인간 너머’로 나아갈 것을 외쳐대며 쉼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의 굴렁쇠를 굴리는 이 인간계의 행성들의 궤적을 스윙바이해서 오르트구름을 뚫고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구효서·소설가
♦인류 2호
에티오피아 밀림의 한 동굴에서, 어쩌면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생존했을 단 하나의 개체(425쪽)’일지도 모르는, 감자와 원숭이를 닮은 유사 인류가, 현세에 발견된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이 동물은 화석이 아닌 생체다. 사람들은 그것을 감자원숭이라고 불렀지만 학계에서 임시로 ‘인류 2호’라 명명한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소설의 문장은 그렇다, 하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 문장이라는 것이며 그것들이 모여 소설이 되는 거니까.
소설만 그렇지는 않다. 성경에서는 ‘빛이 있으라’는 문장으로 빛을 만든다. 최초의 창조물인 빛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빛이라는 Word였던 셈이다. 빛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하나님밖에 없으므로 Word는 God가 된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가 곧 하나님이라(the Word was God. 요한복음1:1)’고 했는지도 모른다. 종교에서 말씀으로 만드는 것을 창조라고 하고, 문학에서 말로 만드는 것을 창작이라고 한다. 《인류 2호》가 창작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방해는 은근히 지속적이고 끈질겨서 혹시 이야기에 몰입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설을 작가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만일 그렇다면 독자가 소설 밖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란 다름 아닌 언어-Word다. 작가는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설명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다. 그 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궁금한데 끈질기게 침묵하니 이야기에 몰입하려다가도 독자는 소설에서 자꾸 튕겨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언어라는 게 구체적으로는 한국어다. 한국어가 몰입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소설의 화자인 ‘인류 2호’가 쓰는 한국어에 대해 어째서 작가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인류 2호’를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한 사람은 동물원 사육사인 늙은 한국인이다. 늙은 사육사와 함께 경기도 소재의 한 허름한 동물원에서 생활했으니 ‘인류 2호’가 습득한 언어는 한국어일 수밖에 없다. 사백 수십 쪽에 이르는 두툼한 ‘한국 장편소설’ 《인류 2호》. 그것을 가득 채운 것은 당연히 한국어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소설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한국에서 습득한 ‘인류 2호’의 한국어라는 사실이다. ‘인류 2호’가 이 작품의 내레이터고, 이른바 1인칭 소설이니까.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호모 사피엔스의 세상으로 뚝 떨어진 것처럼 아프리카 동굴에서 발견된 ‘인류 2호’의 한국어는 놀랍게도 훌륭한 소설가급이다. 그에 비하면 작중에서 언어 분야 연구 책임자로 등장하는 로빈의 말솜씨는 그야말로 형편없다. 모든 말을 ‘~것이다.’로 끝내도 소통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타이슨의 언어 사례까지 흥미롭게 제시된 것만 보더라도 《인류 2호》는 좁게는 소설과 언어, 넓게는 존재와 언어의 문제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 살면서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그 언어에 문화를 혹은 문화에 언어를 삼투시키며, 그에 따른 지정학적 감정의 경험까지 축적한 ‘인류 2호’를 한국인이라고 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진다. 다만 못생기고 키가 작을 뿐이라고 했는데 소설의 말미에 제인이 그린 그의 초상 다섯 장을 보면 호모 사피엔스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한국인이 그러하듯이 그도 호모 사피엔스였던 것. 만일 그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라는 Word일 뿐.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이 아니냐는 문제도 결국은 언어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작가는 간단히 두 문장으로 밝힌다. ‘소설은 인간이 쓴다’ ‘소설이 인간을 쓴다(426쪽)’. 인간보다 빛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인간이라는 말과 빛이라는 말이었으니까.
그럼 그렇지.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소설은 독자를 소설 밖으로 확실히 떠밀어낸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인류 2호’의 진술인 줄 알았더니 조작가가 쓴 소설이었던 것. 서술 주체가 ‘인류 2호’에서 조작가라는 ‘작가’로 갑자기 이동하면서 독자도 얼떨결에 소설 밖으로 떠밀린다. 그래서 이제는 밖이겠거니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바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래서 소설 《인류 2호》는 아주 짜릿해지는데, 혹시 바깥 밖에 양파 같은 바깥들이 줄줄이 기다리는 게 아닐까 싶어지면 불안마저 어떤 체념과 통찰로 이어져 사뭇 담대해지기까지 한다.
안과 바깥이, 픽션과 사실이, Word와 존재가, 서로의 위치를 엎치락뒤치락 바꾸어가다가 그 끝이 다시 처음과 뫼비우스 띠처럼 만나게 될 때, 인간과 소설은 서로가 서로를 쓰게 되어, 무엇이 먼저냐, 무엇이 무엇을 쓰느냐는 질문은 의미를 잃게 되고 말지도 모른다. ‘인류 2호’가 호모 사피엔스의 언어를 익혀 호모 사피엔스가 되든,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 2호’의 언어를 익혀 ‘인류 2호’가 되든. AI가 인간의 언어를 익혀 인간이 되든, 인간이 AI의 언어를 익혀 AI가 되든. 생각하면 불안하고 짜릿해지다가도 어떤 미증유의 담대함-내가 ‘인류 2호’가 된들 어떠랴-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어느 오후에 《인류 2호》를 읽다 보면.*
이승우·소설가
♦구름 사람들
이 소설은 구름 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화자인 ‘나’는 “구름 위에서 태어났다.” 그의 주거지인 구름은 “대기 중에 급격히 늘어난(…) 무슨 먼저인가를 핵으로 삼아 단단하고 널찍하게 뭉쳐진 분홍색 덩어리이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거지들의 핑크빛 요새”이다. 땅에 자기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구름 위에 산다는 설정이 ‘구름’에 드리운 유구한 낭만적 이미지를 걷어낸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 공간이었던 달동네나 무허가 판자촌의 색다른 버전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서사이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공략하는 사회 비판 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황정은의 어떤 소설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가난의 대물림과 극복하기 어려운 신분 사다리, 분노와 증오, 차별과 혐오 같은 화두들이 소설 곳곳에서 독자의 정동을 자극한다. 신분 사다리는 너무나 견고해서 구름 위에서 태어난 사람이 구름에서 벗어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감옥에 가거나(아버지) 땅에 집이 있는 누군가에게로 도망가거나(어머니) 제 목숨을 걸고 엉뚱한 짓을 하거나(동생) 가난을 파는(나) 것 말고는 가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방법들은 모두 파멸적인 것이어서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구름’ 먹는 모습을 유튜브를 통해 내보내다 죽는 동생이나 구름 사람들의 비참한 일상을 다큐멘터리 방송의 소재로 제공하는 ‘나’는 자신들의 불행과 가난을 전시한다는 점에서 같다. 데모조차 통제하는 견고한 구조에 무기력을 느끼고 분노와 증오를 분출할 다른 길을 알지 못해 시청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가는 아버지나 땅에 사는 사람 집에 들어가 남의 아이를 돌보는 편을 택한 어머니는 불행한 현실을 도피한다는 점에서 같다. 전시를 통한 현실 부정은 도피와 다르지 않고, 전시든 도피든 그 토대에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문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이슈들 때문만은 아니다. 구름이 주거 공간으로 제시된 설정이 파격적인 상상력만으로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특정 지역(이른바 게토와 같은)의 단순한 대안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의 어원은 땅과 관련 있다. 그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땅에서 나왔고, 땅을 경작하며 땅에서 산다. 사람의 거주 영역은 물이나 하늘이 아니고 땅이다.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공간. 구름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름 위에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이유리의 소설은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아니, 불가능이 가능해진 시대를 전제로 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전제는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탐욕이 도달한 막장이다. 인간을 규정하는 요소와 조건들이 바뀌거나 추가되거나 삭제되고 있다. 기존의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상들, 주장들, 행동들,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나 있다. 그래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 인간이 아닌가, 하는 질문은 특히 AI와의 공존이 현실화된 오늘날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 소설이 색다른 방식으로 그 사유의 길을 열고 있다고 나는 보았다.
김인숙·소설가
♦구름 사람들
허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름 위. 제목도 그래서 ‘구름 사람들’이다. 하늘, 그것도 구름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몽글몽글하고 포근하고 솜사탕 같은 이야기일 것 같다. 아니면 일종의 신화는 어떤가. 발밑, 까마득한 아래, 땅에 발붙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 비루한 피조물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굽어보는 신들의 이야기라면. 그러나 이유리의 장편소설 ‘구름 사람들’의 세계는 그 어느 쪽과도 가깝지 않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멀다. 그곳은 땅에서조차 살 수 없는 사람들, 고작해야 땅에 발붙이고 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다. 말하자면 한 뼘의 땅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잠시 세 들어 사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속되지 못하고, 등록도 되지 못하고, 거부당한 사람들. 혹은 추방당한 사람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빈곤, 편견, 차별, 오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원인, 현실의 우리 세계가 품고 있는 모든 구조적인 문제들이 농축되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사실 그들이 내몰린 곳이 구름 위라는 것만 빼면 이 ‘구름 위’ 세계는 전혀 낯선 곳이 아니다. 쪽방촌, 철거촌, 쓰레기 매립장, 어쩌면 버려진 탄광 마을이나 수몰촌 같은 곳. 말하자면 현실 세계에 가장 참혹한 형태로 존재하는 극빈촌이나 버려진 곳들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런데 지상에도 존재하는 그 가난한 땅을 두고 어째서 소설 속 사람들은 구름 위까지 올라가야 했을까.
첫 번째 소설집이었던 ‘브로콜리 펀치’에서 보여진 이유리의 세계는 특별했다.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데 그 상상이 불가능한 것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삶 속으로 쑥쑥 들어오고는 했다. 삶을 비틀고 고발하는데, 그것이 좌절이 아니라 위로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아름답고 따뜻했으나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세상은 브로콜리로 변해버린 주먹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일 테니. 때문에 그 희한한 상상력의 세계는 즐겁다가도 참담해졌다. 반대로 말해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 어차피 맞아야 한다면 브로콜리 펀치에 맞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
‘구름 사람들’은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몰리는 하늘, 그것도 오염된 구름 위라는 특별한 상상력의 세계 속에서 폭력과 고통은 더는 우회하지 않는다. 이 소설 속에서 고통은 그 자체로 비명이다. 그리고 구름 위 세계는 마지막까지 내몰린 자들이 스스로 뛰어내리기 위한 곳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적어도 구름 위가 땅보다는 천국에 가깝다’는 이들의 농담은 전혀 위로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몰락과 추락이 더 처절할 뿐이다. 당연히 이들의 세계에 신은 없다. 신이 사는 더 높은 곳의 구름 위 세계도 없다. 바라볼 하늘조차 없는 세계라는 뜻이다. 땅과 하늘이 전복된 세계, 전복되었으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세계, 가난한 자들은 결코 축복받을 수 없는 세계. 이것이 이유리의 ‘구름 사람들’이 사는 세계다.
아주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어디를 비트는가에 따라 그 이야기의 힘이 달라진다. 이유리의 소설을 읽는 즐거움, 혹은 고통이 여기에 있다. 이야기와 함께 독서의 순간이 같이 비틀리기 때문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인류 2호
최재영의 장편소설 ‘인류 2호’는 인류 2호 또는 감자 원숭이라 불렸던 신생 인류의 18년에 걸친 삶을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생애 주기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밀림의 한 동굴에서 새로운 인류가 그곳에서 조난당한 한국의 사육가에 의해 발견된다. 얼굴은 감자를 닮았고 몸은 원숭이와 유사하며 말을 노래처럼 한다. 인류 2호는 사육가가 근무하는 경기도 외곽의 동물원 정글북 파크로 옮겨져 보호되고 연구되고 전시된다. 동물원에서 인류 2호는 사육가의 아내이자 치매 환자인 정숙, 말을 더듬는 언어학자 제인, 정서적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인류학자 로빈, 주변 감시를 담당하는 특수 요원 타이슨, 말은 많지만 제대로 된 작품을 내본 적이 없는 조 작가 등과 함께 살아간다.
주변 사람들이 모종의 소수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들은 인류 2호를 관찰·감시하면서 돌봄과 양육을 담당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인류 2호를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노골화되는데, 현생 인류에게 필요한 약물 개발을 위해 채혈을 하고 조직 샘플을 채취하다 보니 실험의 부작용으로 몸이 붓고 푸르딩딩해진다. 인류 2호는 ‘아담회’라는 소수자들의 컬트 모임에 몰두하게 되고, 인류 2호의 압도적인 소수자적 특성 때문에 그 모임의 교주가 되기도 한다. 인류 2호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목놓아 외친다. 아담회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인류 2호는 부패하고 역겨운 것이 되어 도시를 떠돈다. 그리고는 프릭쇼를 흉내 낸 호모쇼의 쇼맨이 되어 무대에 서는 처지에 이른다. 노년의 인류 2호는 아프리카의 동굴로 돌아가 어느 늙은 유인원의 보살핌을 받으며 죽음을 기다린다.
민감한 독자라면 벌써 예감하겠지만, 러디어드 키플링의 ‘정글북’이나 켄 하퍼의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 등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며 읽게 되는 서사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인류 2호’의 서사적인 새로움이나 완결성에서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는지는 조금은 의심스럽다. 다만 기존의 소설들에서 개인, 가족, 계급, 민족, 국민, 동포, 인종 등의 정체성을 주인공에게 부여해 왔다면, 최소한 ‘인류 2호’에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호모 사피엔스를 관찰하고 기술하는 방식을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은 새로웠다.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한국어로 소통하고 정보를 취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류 2호를 작품의 화자(서술자)로 내세워 신생 인류의 내면을 드러내며 서사를 이끌고 간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인류 2호가 바라본 호모 사피엔스는 어떤 특징을 가진 생물학적 종일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폭력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누군가를 타자화하는 폭력이 불가피한 존재라는 것. 하지만 인류 2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인에 대한 돌봄 또는 보살핌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종이기도 하다는 것. 인간으로 불리는 호모 사피엔스는 폭력과 돌봄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특성을 가진 종이라는 것, 이 정도가 소설 ‘인류 2호’가 말하고자 했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아닐까 생각된다. 소설이 호모 사피엔스의 관점에서 씌어질 가능성이 여기저기에서 논의된 지는 꽤나 오래된 것 같다. 조금 더 기다리는 일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인류 2호’를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혼란스러웠던 생각이 그 부근에 가 닿았을 때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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