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그 오래된 자리에 선 동아시아의 화가들
2026.04.27 13:48
파리는 여전히 세계 미술의 중심이었다. 허물어진 것은 건물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앵포르멜이 일어났고 타시즘이 일어났다. 형태를 거부하는 손들이 물감을 캔버스에 내던졌다. 그 폐허의 한가운데서 서구의 화가들과 비평가들은 낯선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아시아의 선불교·도가의 무위·서예의 획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양 문화의 씨앗은 이미 오래전에 뿌려져 있었다. 1906년에 오카쿠라 텐신이 『차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텐신은 다도를 하나의 철학이자 종교로 설명했다. 덧없음 속의 아름다움, 불완전함에 대한 숭배, 일상의 정적 평화, 서구의 물질문명이 도달하지 못한 자리에 차 한 잔의 미학이 놓여 있었다. 1936년에 에즈라 파운드가 편집한 어니스트 페놀로사의 에세이집 『시의 매체로서의 중국문자』는 중국 한자의 구조를 서구 시학의 자원으로 끌어왔다. 표의문자가 품고 있는 형상의 힘을 파운드는 알아보았다.
지난 25일 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 이응노연구소는 '파리의 이응노와 중국 화가들'이라는 주제로 2026년 상반기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과 중국의 석학들이 모여 전후의 파리에서, 한중 예술가들의 활동과 교류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에콜 드 파리
전쟁 뒤에도 파리는 파리였다. 아시아의 젊은 화가들이 새로운 미술을 찾아 대서양과 대륙을 건넜다.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파리에 머문 일본인 화가는 100명을 넘었다. 중국과 대만 출신은 50명 이상, 한국은 1970년대까지 합쳐도 30명 남짓이었다.
일본은 문화청 산하 기관이 유학생을 선발해 파견했고, 파리의 일본 문화원이 전시와 행사를 열어 주었다. 국가가 화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중국은 사정이 달랐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문화의 수입선은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 파리에 유학을 갔다 돌아온 우관중(吳冠中)은 훗날 부르주아 예술이라는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한국은 더 궁핍했다. 한국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국가가 화가의 여비를 대줄 형편이 아니었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주머니를 털어 배에 올랐다. 비자를 받으려면 학교 입학 허가증이 필요했고, 그래서 많은 한국인이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그랑쇼미에르에 적을 두게 됐다. 그곳에서 형성된 것은 서정적 추상이었다. 자연의 형태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고 감각과 색채로 내면을 옮기는 방식이었다. 이성자, 남관, 김흥수 등의 작업은 이 흐름 위에 놓였다.
이응노는 파리에 도착했을 때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많은 한국 화가들이 비자를 위해 아카데미 그랑쇼미에르에 이름을 올릴 때, 이응노는 곧바로 작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화랑에 발탁되었다. 시작부터 다른 길이었다.
당시 세르뉘스키 미술관은 전후 파리에서 동양 미술의 제도화를 이끈 핵심 기관이었다. 1961년 〈에콜드 파리의 극동 화가들〉 전시에 이어, 이 미술관은 1964-1965년 내부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곳은 전후 파리의 동서 미술 교류의 중요한 거점이 됐다. 이응노는 이곳에서 프랑스 중산층에 서예의 기법과 정신을 가르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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