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광장, 바뀐 주인…빈백으로 채운 '관리의 공간'
2026.04.26 14:00
올해도 서울야외도서관이 문을 연다. 광화문광장과 청계천, 그리고 서울광장에서다. 어느새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잔디 위에 놓인 빈백, 만 권이 넘는 책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앉거나 누워 책을 읽는다. 서울시는 이 프로그램들을 두고 디지털 디톡스, 집단 몰입 독서라고 부른다. 올해는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야외도서관 투어도 예정돼 있다.
서울광장이라는 이름이 공식화된 것은 2004년이다. 이전까지 이 자리는 방사형 도로들이 만나는 로터리였고, 차량에 점유된 채 보행자가 걸어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다. 그랬던 것이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동안 시청 앞 차로를 점거하다시피 한 거리응원 인파로 인해 공간의 성격이 완전히 뒤집혔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의 국화 행렬, 2014년 세월호 분향, 2016년과 2017년을 가로지른 탄핵 촛불, 2022년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 매년 여름의 퀴어퍼레이드 등등. 수차례의 파업과 행진이 이 잔디 위에서 벌어졌다.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모이는 곳'. 그것이 서울광장의 시작이자, 지난 20여년 이 광장이 맡아온 역할이었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경찰이 서울광장을 경찰버스로 둘러싸 시민들의 진입을 막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시민사회는 10만명 서명의 주민발의 운동을 벌였고, 2010년 지방선거로 구성된 민주당 주도 시의회가 이를 조례로 구현했다. 광장 사용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는 일이었다. 당시 오세훈 시장은 이 조례 개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듬해에는 조례 자체에 대한 무효소송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그해 8월 시장직을 사퇴하면서 서울광장 논란도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오세훈 시장이 2021년 재보궐선거로 서울시장에 복귀하면서 '책 읽는 서울광장'을 핵심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다. 서울광장의 용도를 의도적으로 재편하려는 의지가 담긴 사업이었다. 개장을 앞두고 오세훈 시장은 개인 블로그에 '12년 전 서울시 신청사를 새로 지을 때부터 시민들이 서울광장에서 자유롭게 책 읽는 모습을 꿈꿔 왔다'고 회고했다. 시끄러운 행사를 진행하기보다 조금은 정온하고 차분한 서울광장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앞으로 이곳은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집회보다 철저하게 기획되고 통제된 행사 위주로 운영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허가제처럼 사용되는 광장
2015년부터 매년 서울광장에서 열려왔던 서울퀴어퍼레이드가 바로 도마 위에 올랐다. 2023년 5월,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같은 날짜에 신청이 겹친 기독교단체의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와 경합 심의에서 밀려났다. 서울시는 청소년 관련 행사를 다른 신고보다 우선 수리할 수 있다는 조례 규정을 근거로 들었지만, 퀴어퍼레이드 또한 참가자 상당수가 청소년과 청년인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결국 그해 퀴어퍼레이드는 을지로로 밀려났고 이듬해 서울광장을 다시 신청하자 해당 날짜에 책 읽는 서울광장 행사가 이미 예정되어 있어 사용이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봄과 가을시즌 매주 금·토·일은 책 읽는 광장 일정이고 특히 5월과 6월 주말은 이미 전년도에 확정된 상태다. 신고제라는 형식은 본래 서울시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시민의 자유로운 이용을 원칙으로 한다. 서울시에 광장 사용을 허가할지 말지 판단할 권리는 없다. 신고 요건을 갖춘 사용 신청을 수리하는 관리자일 뿐이다. 광장의 주인은 서울시가 아니라 시민이라는 전제가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운영 방식은 이 전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있다. 허가를 거치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된 제도가 서울시 산하 기관, 즉 '서울도서관'의 선제 신고를 통해 사실상 허가제처럼 작동하게 만든 것이다. 서울시 주관 프로그램으로 채워진 광장에 민간이 들어설 자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울야외도서관의 주제며 프로그램, 책 목록, 일정 따위는 모두 서울시가 큐레이션해서 시민들에게 제공한다. 시민들은 그저 서울시가 기획한 체험 메뉴 중 하나를 골라 이용하는 손님에 불과하다. 심지어 올해 신설된 외국인 투어는 책 읽는 시민들을 다른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구경거리로 만드는 발상이다. 이제 시민은 광장에서 무언가를 스스로 피워내는 주체가 아니라 광장에 마련된 콘텐츠를 소비하고 때로는 그 콘텐츠의 일부가 되어 전시되는 객체로서 머물게 됐다.
물론 광장은 어느 사회에서나 관리의 대상이다. 그러나 시민 집회의 역사를 가진 광장이 행정 주도 행사로 체계적으로 대체되는 일은 오직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사회에서만 나타난다.
홍콩 빅토리아파크는 영국 식민지 시기부터 시민 집회의 공간이었다. 매년 천안문 추모 촛불집회와 홍콩반환일 민주화 행진이 이곳에서 열렸고, 송환법 반대 시위도 이 공원에서 집결됐다. 하지만 민주화 시위가 대규모로 이어지자 중국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분리독립과 국가전복, 외국 세력과의 결탁을 광범위하게 처벌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파크에서 매년 열리던 촛불집회는 감염병을 이유로 먼저 금지됐으며 보안법 시행 뒤 주최 단체도 해산됐다. 그 자리에는 친중 단체가 주관하는 관광 축제가 들어서고 있다.
광장에 행정이 개입하면 시민은 손님으로
태국 방콕 사남 루앙은 왕실 의례가 거행되던 공간이었다가 1932년 입헌혁명 이후 시민의 정치 공간으로 변모한 곳이다. 몇 해 뒤 인근 왕궁 앞에는 '이곳에서 인민당이 헌법을 세웠다'는 문구가 새겨진 청동 명패가 놓였다. 이후 사남 루앙에서는 학생운동부터 최근의 군주제 개혁 시위까지 주요 정치 집회가 이어졌다.
그러던 2017년, 태국 정부는 야밤에 몰래 인민당이 설치한 명패를 떼어내고 왕실을 찬양하는 명패로 바꿔놓는 일을 벌인다. 시위대는 같은 디자인의 명패를 광장 바닥에 새로 박았지만 새 명패는 하루 만에 철거됐으며 주동자들은 유적 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시 당국은 광장에 울타리를 치고 개방 시간을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걷기와 달리기 외의 모든 활동을 금지시켜버렸다. 2024년부터 정부 주도의 대규모 관광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지난해 봄에는 태국관광청 주관의 대형 현대미술 전시가 광장에서 열렸으며, 4월 초에도 대형 퍼레이드와 드론 쇼가 광장을 채웠다.
광장에서 시민이 밀려나는 일은 언제나 더 부드럽고 세련된 이름으로 일어난다. 사람들이 빈백에 누워 책을 읽는 4월의 서울광장에서는 정온하고 차분한, 서울시장이 십수 년 전부터 꿈꿔왔다는 그 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다만 그 장면은 시민이 광장의 주인으로서 무언가를 스스로 피워낼 수 있었던 조건들을 밀어낸 자리에 놓여 있다. 촛불이 타오르던 자리, 국화가 쌓이던 자리, 무지개 깃발이 흔들리던 자리, 파업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던 자리에. 체험과 관광이라는 메뉴 안에서 시민은 광장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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