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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가라테 1인자 최영의 “모체는 태권도”라고 했지만…

2026.04.26 05:01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94년 4월 26일 71세

극진 가라테 1인자 최영의.

1967년 11월 27일 일본 가라테(空手) 극진회관 관장 최영의(1923~1994)는 한국태권도연맹 초청으로 서울을 찾았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10대 중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1947년 전후 최초의 일본 무도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가라테 1인자로 떠올랐다. 당시 신문은 최영의의 귀국은 30년 만이라고 보도했다.

“세계공수도연맹총본부인 일본의 극진회관 관장이며 당수계의 제1인자인 재일 교포 최영의 8단(44)이 한국태권도연맹 초청으로 27일 낮 30년만에 JAL기편으로 모국을 방문했다. 최씨는 일본 도오꾜에만도 2만여명의 제자를 두고 있으며, 38개국 3백여 지부에 많은 문하생을 거느리고 있다.”(1967년 11월 28일 자 6면)

1967년 11월 28일자 6면.

1960~70년대 언론은 ‘가라테’를 ‘태권도’와 동일한 무술인 것처럼 소개했다. 당시 기사는 최영의를 “국제 태권도계의 1인자” “30년 만에 귀국한 태권왕” “국제 태권도계의 원로” 등으로 적었다. 최영의도 방한 인터뷰에서 “한국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겠다”(1967년 11월 30일 자 8면)고 말했다.

가라테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지만 이를 태권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968년 미국 합동태권도연맹 회장 조시학은 가라테라는 이름을 태권도로 바꾸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했다.

1967년 11월 30일자 8면.

“그는 이제 할 일이 “가라데라는 이름을 태권도로 바꾸는 것”이라면서 점차적으로 코리어 가라데→태권도(가라데)→태권도로 고칠 계획이라고. 그러기 위해서 태권도는 독특한 고유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1968년 7월 4일 자 8면)

태권도협회는 1973년 5월 25일 개막한 “제1회 세계 태권도선수권 대회에 특별 손님으로 국제 가라데연맹 회장인 최영의씨를 초청”(1973년 5월 23일 자 8면)했다. 당시 기사는 ‘가라데=태권도’라는 바탕을 깔고 서술했다. “가라데로 세계에 한국의 얼을 심은”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1970년 7월 8일자 6면.

“가라데로 세계에 한국의 얼을 심은 최 장사는 30년 전 고향인 전북 김제에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항공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졸업, 기요스미(清澄山)에서 2년간 수련한 그는 일본 극진류(極眞流) 가라데를 창조하여 지금 세계40여개국에 4백여개의 도장을 갖고 있다. 51세의 나이에 비해 탄력 있는 체격과 눈매가 날카로운 최 장사는 “세계 태권도 선수권 대회가 모국에서 열리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말문을 열면서 “태권도의 보급도 중요하지만 국기인 만큼 품격을 높여야만 종주국으로서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1973년 5월 26일 자 8면)

1973년 5월 26일자 8면.

최영의는 1975년 도쿄에서 제1회 세계 가라데선수권 대회를 열었다. 2년 전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 대회와 관련 없는 별도 대회였다.

“1일 동경체육관에서 개막된 이 대회는 미끼 일본 수상과 훗세인 요르단 왕 및 모하메드 황태자, 샬렘 이란 황태자, 카를로스 스페인 황태자를 대회 고문으로 하여 세계35개국 128명의선수가 출전 개막했다. 실전 본위의 ‘극진권’으로 가라데계(界)를 지배하는 오야마 마스다쓰(大山倍達·최영의)씨는 일본에서 ‘신화적인 괴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1975년 11월 2일 자 6면)

1975년 11월 2일자 6면.

위 기사에서는 ‘가라데=태권도’라는 내용은 없다. 최영의보다 오야마 마스다쓰라는 일본 이름을 먼저 썼다. 다만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한국 소년의 꿈이 이제 실현되었읍니다. 전세계 대회-그것은 ‘필생의 꿈’이었읍니다.” 그는 한국 사람임을 잊지 않고 있다. 이름에도 ‘배달(倍達)’을 넣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잠들 때는 고국에 묻히리라고 묘자리까지 봐두었다는 것이다.”

‘최배달’이란 이름은 최영의의 삶을 다룬 만화 ‘대야망’(고우영 작)과 ‘바람의 파이터’(방학기 작)에 등장하면서 대중에게 본명보다 더 알려졌다.

최영의는 1981년 방한 인터뷰에선 “가라데의 모체는 태권도”라고 말했다.

1981년 1월 30일자 8면.

““가라데의 모체는 한국의 태권도입니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익혔던 무술이 가라데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세계 가라테의 최고봉인 그가 가라테의 모체는 태권도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은 그 가슴 깊이 ‘조국’이 새겨져 있는 탓. “몸은 비록 일본에 있어도 마음만은 항상 한국에 와 있다”고 최씨는 조국의 그리움을 털어놓았다.”(1981년 1월 30일 자 8면)

1990년대 이후에는 ‘가라테=태권도’라든지 ‘가라테의 모체는 태권도’라는 내용은 찾기 어렵다. 2010년 극진 가라테 한국 지부장인 김도건 사범 인터뷰 기사에서는 가라테의 원류에 대해 “중국 무술 남권(南拳)이 14세기 오키나와로 전해져 토착 무술과 합쳐졌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2014년 ‘최배달의 극진가라테, 일 대표해 올림픽 도전’ 기사에서 가라테는 태권도의 위상을 위협할 수 있는 일본의 무술로 서술했다.

2014년 5월 3일자 A13면.

“1947년 일본 가라테(空手道) 전국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가라테 고수였던 최배달이 가라테를 실전 중심의 무술로 만든 것이 극진가라테이다. 그는 전국을 돌며 고수들과 격투를 벌이는 이른바 ‘도장 격파’로 일본을 제패했다. 맨손으로 소 47마리를 쓰러뜨리고 그중 4마리를 즉사시킨 일화는 지금도 전설이다.(…) 아사히(朝日)신문은 극진가라테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인 가라테와 손잡고 올림픽에 공동 진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레슬링에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이 있는 것처럼 가라테와 극진가라테를 묶어서 올림픽에 진출시키자는 것이다.(…) 극진가라테와 가라테가 공동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경우 TV 시청률이 저조한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2014년 5월 3일 자 A13면)

최영의의 집안은 정부 수립 20년을 맞은 1968년 8월 한국인의 변화를 보여주는 시리즈 ‘한국상(韓國像) 20년-사진으로 본 그날과 오늘’ 기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어느 일가(一家)’로 소개됐다.

1968년 8월 16일자 1면.

“20년이 흘러간 그 집안은 해방과 정변 속에서도 굳건히 자라 6형제의 역군을 길러 내었다. 그 밑에는 다음 세대가 또 다복스럽다. 호남의 한 면장의 장남(최일운)은 20대에서 50대의 대학교수가 되었고,그때 18세의 홍안 최영의(4남)는 태권도 8단-일본을 근거지로 세계에 130개의 도량을 거느린 국제인으로 성장했다.”(1968년 8월 16일 자 1면)

기사는 20년 전과 현재의 가족 사진을 함께 배치하고 부모·형제들을 소개했다. 기사에서 37세 신문기자로 소개된 최영의의 동생인 5남 최영정은 1959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한국 ‘1호 골프 기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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