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엔 군수, 해방 후엔 도지사와 장관 역임한 친일파
2026.04.25 16:36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이승만은 오히려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친일파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다수의 대한제국 관료들이 저항 없이 일제의 관료가 되었듯이, 1945년 8월 15일 또한 자연스럽게 친일 관료들이 대한민국 정부의 관료가 되었다. 그 누구 하나 반성하거나 사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상을 잘 나타내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친일파 김홍식(金弘植, 1901~1974)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수를 하고, 해방 이후에는 장관까지 오른 김홍식의 행적과 지금까지 부천군수로서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 행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김홍식의 일생
김홍식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1927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1932년 9월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34년 11월에는 일본 고등문관시험인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 이듬해인 1935년 10월에는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행정관료가 된 김홍식은 1939년 7월 평남 양덕군수, 1941년 3월 평남 개천군수를 거쳐 그리고 1943년 3월 부천군수가 되었다. 양덕군수로 있으면서 친일잡지인 <내선일체>를 발간하는 내선일체실천사 평안남도지사의 고문을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김홍식의 관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김홍식의 삶만 보면 관운을 타고났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고위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월까지 경기도 광공부 광공부장을 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잠깐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인천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인천신문사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변호사와 언론을 벗어나 1956년에는 민의원에 도전한다. 정치에 투신한 것인데 낙선하였다. 이후 다시 행정관료로 복귀하여, 1956년에는 사정위원회 사정위원이 되었으며, 1960년 5월에는 충남도지사가 되었다. 1961년 12월에는 우리나라 제1대 법제처 차장이 되었으며, 1963년 12월에는 무임소장관, 1964년 7월에는 체신부 장관이 되었다.
김홍식의 부천군수로서의 친일행위
김홍식이 부천군수로 재임한 1943년 3월 이후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물적 자원의 수탈과 인적자원의 강제동원이 가장 심한 시기에 김홍식은 부천군수로서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군식량으로 활용하기 위한 쌀, 메밀(교맥), 보리(맥류), 고구마, 감자 등의 공출 뿐만아니라 군수용품을 만들기 위해 이용되는 금속류, 놋그룻의 공출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외에도 피마자, 해바라기, 송탄유, 목재, 고(藁)공품 출하에도 열성이었다.
김홍식은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못자리에 정성을 들였으며, 밭두둑과 공한지 등에는 대두를 심을 것을 장려하였다. 조금이라도 남는 땅이 없이 일제에 바칠 농산물을 생산하라고 독려하였다. 특히 권농기념일을 맞이하여 소사신찬답(소사읍 구지리)에서 진행된 풍년기원제에도 참석하여 직접 모내기를 하였다. 이 행사는 부천군의 이도(伊藤)내무과장 다케시로(竹城)권업과장 이하 전 직원, 소사읍의 모도무라(元村)읍장 및 각 관공서원, 군민유지, 소사국남국민학교 아동 등 수백 명이 참가할 정도로 성대히 치러졌다.
| ▲ 친일파 김홍식 부천군수의 1943년 6월 17일 매일신보 기사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1943년 6월 14일 제16회 권농기념일을 맞이하여 부천군수 김홍식이 참여한 가운데 소사신찬답(소사읍 구지리)에서 진행된 풍년기원제 모습이다. 구지리는 현재의 송내동이다. |
| ⓒ 국립중앙도서관(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
애국기 헌납에 적극적이었다. 부천군 차원에서 1942년 8월 처음으로 일제에 애국기가 헌납되었는데, 김홍식이 부천군수로 재임한 1943년과 1944년에도 헌납하였다. 1943년 경기도에서는 100대의 애국기를 헌납하기 위해 부천군에서18,348원이 배정하였는데 이를 12월 말까지 완료하였으며, 1944년 4월에는 부천군 단독으로 5만2천이 넘는 금액은 헌납하였다.
1943년 8월 1일부터는 징병제 실시를 위해 부천군 각 읍면에서 병사사무를 개시하였으며, 동시에 각 읍면별로 징병 축하행사를 진행하였다. 징병 및 지원병 모집을 하기 위해 유림단체 뿐만아니라 지역 유지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3년 11월에는 '대동아전 2주년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이외에도 저축장려, 퇴비증산 운동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따른 군수물품과 군비를 보충하기 위해 군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친일청산과 김홍식 충남도지사
1965년 5월 관료에서 퇴직하고 동년 7월 서울신문사 이사가 되었으며, 1969년 2월에는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74년 2월 21일 사망하면서 김홍식의 친일행위는 잊혀지는 듯했다. 단순히 김홍식의 일생을 보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 중 하나로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김홍식의 친일행적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서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 의해 밝혀졌으며, 2020년 충청남도 누리집(홈페이지)에 친일파로 규정됨으로써 시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충청남도에서 도민을 비롯해 국민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친일인명사전등재"라고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 ▲ 김홍식의 친일행적을 알려주는 충청남도 누리집 제10대 부천군수(1943년3월~1945년8월)를 지냈던 김홍식은 1960년 5월 제7대 충청남도 도지사가 되었다. 충청남도에서는 역대도지사를 설명하며 김홍식을 친일파로 표시하여 안내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전국적으로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모범적인 사례라할 수 있다. |
| ⓒ 충청남도 누리집(홈페이지) |
친일파 김홍식을 통해 한 인간의 일생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통해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는 절대 감추어질 수 없고 후대에 반드시 알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김홍식을 친일파 부천군수, 친일파 충남도지사로 기억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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