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남의 집 얹혀살았는데"…떠돌이 男, '최고' 된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2026.04.25 07:01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
그 남자는 평생 자기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생 남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지요. 한곳에 머물다가 떠나고, 또 다른 집에 들어가 살다가 또 떠나고…. 그런 떠돌이 생활이 끝없이 반복됐습니다.
가난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돈을 꽤 잘 벌었습니다. 화가였던 그는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었습니다. 은행가와 미술상들이 줄 서서 그의 그림을 샀습니다. 하지만 번 돈을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맨손으로 출발한 뜨내기였습니다. 집을 살 만큼 돈을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폐병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항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그에게 미래를 준비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했습니다. 화려한 파티가 열리고, 아름다운 공원에서 귀족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장면.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이 결코 초대받을 수 없는 파티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서양미술사에서 ‘로코코’라고 불리는 화려한 미술의 시대를 엽니다. 로코코를 만든 화가, 앙투안 바토(1684~1721)의 이야기.
무일푼으로 며칠을 걸어 도착한 파리. 그곳의 사람들은 바토에게 차가웠습니다. 바토의 고향인 발랑시엔은 불과 6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땅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네덜란드의 영토를 루이 14세가 전쟁으로 빼앗은 곳이었지요. 그래서 파리 사람들은 발랑시엔 사람들을 외국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외국 사람 아니냐며 화가 조합(길드)에 가입하는 것도 거부당했습니다.
그래서 바토는 노트르담 다리 위의 작업장에 취업해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공장 노동에 가까웠습니다. 유행하는 그림을 똑같이 베껴서 찍어내는 일이었습니다. 월급은 쥐꼬리만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에서 고시원비 내고 컵라면만 먹기에도 빠듯한 돈이었습니다. 외롭고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바토가 만난 게 ‘코미디아 델라르테’였습니다. 코미디아 델라르테는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가면 연극. 떠돌이 극단이 광장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가면을 쓰고 즉흥 연기를 펼치곤 했지요. 이들이 연기하는 광대, 하인, 사기꾼, 실연당한 바보 같은 캐릭터들에 관객은 웃고 울었습니다. 바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바토는 이 극단을 자기와 비슷한 처지로 느꼈을 겁니다. 집도, 정해진 무대도 없이 떠도는 이방인들이었으니까요. 또 하나 그를 위로해줬던 건 프랑스 궁전에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풍성한 색채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물들. 바토의 고향인 플랑드르 문화권의 대선배 화가, 루벤스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작업장 생활에서 독립해 그럭저럭 화가 생활을 이어가던 바토. 상에도 응모하고 여러 노력을 하지만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공식 미술은 왕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크고 장엄한 그림이었습니다. 바토가 그리는 그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작고, 사적이고, 어딘가 쓸쓸한 그림. 그의 그림은 시대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715년, 그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세상이 바뀝니다.바로 그 해 루이 14세(1638~1715)가 사망했습니다. 왕위에서 보낸 세월은 72년. 지금 우리나라로 치면,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사람이 올해 죽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의 별명은 '태양왕'이었습니다.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왕권을 지닌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건 루이 14세의 독특한 통치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어린 시절 귀족들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루이 14세는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면 귀족들이 힘을 못 쓰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파리 근교에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을 지방 영지에서 이 궁전으로 불러들여 자기 곁에 항상 머무르게 했지요. 궁전에 갇혀 사는 귀족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딴생각할 여유도 없었고요.
여기에 더해 루이 14세는 '모두가 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왕과 가까이하는 귀족은 칭찬받고 연금, 관직, 세금 감면 같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왕에게 잘 보여야 돈이 나오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왕의 기상을 지켜보는 것, 왕의 식사를 지켜보는 것, 왕의 취침을 지켜보는 것이 특권이 됐습니다. 왕의 변기를 드는 일조차 귀족들이 “내가 들겠다”고 서로 싸웠을 정도였으니까요.
미술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도구였습니다. 루이 14세는 크고 장엄한 바로크 그림으로 자신의 위대함과 권위를 자랑했습니다. 자기 영지에서는 작은 왕처럼 대접받던 귀족들이었지만, 이런 분위기에 있다 보니 서로 경쟁하며 왕의 사랑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이 계속되면서 귀족들은 왕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성공적인 '가스라이팅'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왕이 죽었습니다. 해방이었습니다. 궁전에서 풀려난 귀족들은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자유를 되찾은 파리의 자기 저택에서 살롱을 열고, 자유로운 사교 생활을 시작합니다. 취향도 바뀌었습니다. 왕의 권위를 증명하던 크고 장엄한 그림은 이제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했습니다. 대신 귀족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예쁜 그림, 작고 부드럽고 사치스러운 그림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림의 내용도 서로 사랑하고 장난치는 사적인 장면들을 선호했습니다. 왕의 미술에서 귀족의 미술로. 이런 미술을 '로코코'라고 합니다. 귀족들이 좋아하던 조개껍데기 모양 장식인 '로카이유'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바토가 원래 갖고 있던 감성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마침내 바토의 시대가 온 겁니다.멀리서 온 이방인. 폐병을 앓고 있었고, 텃세에 시달렸으며, 평생 자신이 머물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왕과 귀족의 세계를 곁에서 바라봤던 사람. 바토는 자신이 갖고 있던 감성, 사적이고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그 감성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바토가 그린 것은 귀족들의 우아한 파티 장면이었습니다. 실제로 파티를 보면서 그린 것도 아니었고, 실제 귀족들의 파티 장면이 이렇게 우아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토의 그림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귀족들이 살고 싶었던 그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1717년, 바토는 왕립 아카데미에 한 점의 그림을 제출합니다. ‘시테르 섬의 순례’. 시테르 섬은 그리스에 실제로 있는 섬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바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곳으로 여겨 온 장소지요. 그림 속 인물들은 이 사랑의 섬에서 유혹하고, 함께 걷고, 배를 향해 걸어갑니다. 배경은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한 풍경입니다. 계절도 알 수 없고, 새벽인지 황혼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루벤스에서 배운 풍성한 색채와 부드러운 붓터치를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이 사람들은 사랑의 섬에 도착하는 것일까요, 떠나는 것일까요?
떠나는 것이라는 쪽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일단 커플들이 이미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사랑의 섬에 도착하기 전이라면 아직 혼자인 게 자연스럽겠지요. 그리고 오른쪽에서 세 번째 커플의 여자가 뒤를 돌아 아프로디테 석상 쪽을 아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건 떠나는 사람의 눈빛에 가깝습니다. 반면 시테르 섬에 도착하는 장면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큐피트들이 화면 왼쪽의 배 주위에서 흥분해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비롯해 전반적인 분위기가 '시작의 설렘'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 논쟁은 300년째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애매함이 바로 바토 그림의 매력입니다. 화려한데 쓸쓸합니다. 파티인데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 시작인데 이별 같습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던 사람이 그린 쾌락의 장면이기 때문일까요. 어떤 즐거움도 영원하지 않다는 감각이 그림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바토가 평생 느꼈던 감각이 이 그림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겁니다.이 그림은 왕립 아카데미를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카데미에는 그림을 분류하는 체계가 있었습니다.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같은 장르 구분이 있었지요. 그런데 바토의 그림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너무 아름답게 잘 그린 그림이었으니까요. 결국 아카데미는 바토의 그림을 넣을 장르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 직역하면 '우아한 연회'라는 장르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 대히트를 치면서 음원 차트에 새 카테고리가 생긴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해프닝 덕분에 바토는 결과적으로 더 유명해졌고, 돈도 벌었습니다.
하지만 바토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격은 과묵하고 까다롭고 신경질적이었습니다. 돈과 미래에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집도 없었고, 후원자의 초대를 받아 머무르더라도 금방 떠나버렸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치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했다." 그가 앓고 있던 폐결핵은 당시 불치병이었습니다.
바토의 그림 중에는 ‘피에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토가 좋아하던 가면극, 코미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광대 피에로를 그린 그림입니다. 흰 의상을 입은 피에로가 무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연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뒤에 있는 다른 배우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데, 피에로만 혼자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코미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피에로는 주로 남들에게 당하는 역할입니다. 속고, 버림받고, 결국 혼자 남는 캐릭터입니다. 바토는 이 인물을 그림 한가운데 세웠습니다. 무대 위에 있지만 무대에 속하지 못하고 홀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바토는,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오래 서 있지 못할 자신과 저 피에로를 겹쳐 봤을 겁니다.1719년 서른다섯 살이 된 바토는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영국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유명한 의사까지 찾아가 봤지만 그의 폐결핵은 낫지 않았습니다. 런던의 습하고 탁한 공기는 오히려 병을 악화시켰습니다.
이듬해 여름, 파리로 돌아온 바토는 몇 안 되는 진짜 친구였던 제르생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바토는 제르생에게 가게 간판을 그려주겠다고 자청합니다. "차가운 손가락을 좀 풀고 싶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8일 만에 바토는 작품을 완성합니다. 가로 3미터가 넘는 큰 그림. 제르생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이 그림의 성공은 대단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었고, 가장 뛰어난 화가들도 여러 번 와서 감탄했다."
1721년 초 바토는 제르생의 집을 떠났습니다. 고향 발랑시엔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약해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바토는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토의 명성이 유럽 전역으로 퍼진 건 훗날 다른 친구가 그의 드로잉과 회화를 판화로 만들면서였습니다. 이 판화를 본 사람들은 바토의 그림에 감동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프랑수아 부셰(1703~1770)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린 그림이 인기를 끌면서 로코코 미술은 한 시대를 주름잡게 됩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하나의 사조가 될 정도로요. 미술사학자 폴 뒤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바토 없이는 부셰도, 프라고나르도, 샤르댕도 없었을 것이다. 바토 없이는 마네도 없었을 것이다. 근대 미술은 바토에서 시작된다."
로코코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을까요. 어쩌면 로코코라는 사조의 원형(原形)을 만든 바토의 삶과 작품에 녹아 있는 미묘한 서글픔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즐거움은 언젠가는 끝날 운명.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는 애잔함을 품고 있고, 바토의 그림에는 그 본질을 전달하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후대 작가들의 로코코 그림에는 바토의 그림에 있는 서글픔이 없이 그저 화려함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기만 했던 귀족 문화와 후대 로코코 미술은,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파멸하며 끝나고 맙니다.
**이번 기사는 Antoine Watteau(Donald Posner 지음), Watteau, 1684~1721(National Gallery of Art·Galeries nationales du Grand Palais·Schloss Charlottenburg 공동 전시 카탈로그), French XVIII Century Painters(Edmond de Goncourt·Jules de Goncourt 지음), Antoine Watteau: Perspectives on the Artist and the Culture of His Time(Mary D. Sheriff 지음), Watteau's Soldiers: Scenes of Military Life in Eighteenth-Century France(Aaron Wile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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