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서핑 명소 양양, 이들의 주검 위에 세워졌다
2026.04.24 18:01
| ▲ 이라영 <쇳돌> 표지 |
| ⓒ 동녘 |
서울 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로 양양은 친숙한 곳이 되었다. 동해안을 가기 위해 더는 영동 고속도로를 타지 않으면서, 서울 양양 고속도로는 그 종착지인 양양에 관광객을 부려 놓는다. 동해바다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려주는 관광지 '양양', 이제는 서핑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곳에 철광산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라영의 역작 <쇳돌>을 통해서였다.
처음 접한 것은 철광산의 존재만이 아니다. 양양이 한때 '양양 하와이'로 불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지명의 연원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양양은 해방 후 북부는 소련이 남부는 미국이 관할하다, 1948년 이후 북부는 북한에 남부는 남한에 귀속되었다. 그러다 6.25 전쟁이 터졌고 1953년 휴전 후 남한에 수복되었는데, 남한에 가장 늦게 편입된 곳이라는 뜻으로 '하와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드라마틱하게 들리는 이 변천은 실상 엄청난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
내 엄마는 강원도 철원 출신의 '피난민'이었다. 이곳 역시 6.25 전쟁 막바지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활개치는 살벌한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엄마는 죽을 때까지 그때의 공포를 잊지 못했다. '양양 하와이'라는 지명은 바로 이런 극단적인 불안과 공포를 집약하고 있었다.
남한에 수복된 후 이곳은 즉시 북에 부역한 이들을 색출하는 일로 초토화되었다. 저자의 아버지 가족 역시 '빨갱이' 몰이에 휘말렸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은 사는 내내 어디든 따라다니며 "다 지켜보고 있"는 감시의 눈길에 시달리게 했고, 무엇보다 창창한 젊은이의 앞길을 '연좌제'로 막았다. 그나마 갈 수 있는 곳이 광산이었다. 아버지는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광산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아버지 가족의 아픈 역사와 더불어 '쇳돌'의 존재를 다시 파헤치게 된 건 고모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장례를 치르며 고모이기만 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 입체화되는 경험을 한다. 아마도 가족의 장례를 치러 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무슨 뜻인지 감이 오리라.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장례식장을 방문하는 친척이나 친지 등의 입을 통해 툭툭 던져지는 증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고인의 일면을 낯설게 들추어내지 않던가.
저자의 고모는 조금 남다른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감시받으며 살며 길들여진 후천적 결박감 때문이지 않았을까. 평생 독신으로 어찌 보면 외롭고 가난하게 살았던 고모로 인상지어졌던 그녀가 19세에 양양 철광산 광업소의 선광부(돌을 분류하는 부녀 노동자)였고, 사범학교를 졸업했으나 교사로 임용될 수 없는 연좌제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전후는 무엇보다 먹고사는 게 급선무였기에 고모도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광산에서 돌을 고르는 낮은 임금의 일은 젊은 여성에게 열려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었고 연좌를 피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철광산의 '광부'가 고모는 '선광부'가 되었다. 광산의 역사에 한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가 올올했다.
광산 하면 보통 석탄 탄광을 떠올리지만, 양양의 철광산처럼 석탄이 아닌 광물을 채굴하는 곳도 많았다. 금을 캐는 금광, 철을 캐는 철광,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충주에서 만난 옥을 캐는 옥광까지 다양했다. 광산의 역사는 일제의 수탈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해안을 따라 이어진 철로는 바로 이런 광물을 나르기 위한 운송 수단이었다. 유명한 관광지인 정동진에는 동해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관광열차가 운행되는데, 이 철로의 존재가 바로 이곳이 광산이었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모두 잊혔다. 광물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광부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문명이 바로 이들의 주검 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은 관광지라는 유희로 쉽게 망각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망각에 도전하기 위해 '목소리들'을 듣고 남기기로 한다. 저자가 만난 많은 광부들과 광부의 가족들의 증언은 마땅히 부여해야 했으나 누락시킨 노동자의 삶과 지위를 환기시킨다. 사회는 이들이 목숨과 맞바꾸다시피 캐낸 철과 석탄으로 이룬 문명을 누렸으면서도, 쉽게 사양 산업이라는 자본의 논리로 "마땅히 없어져도 되는 일"로 일축하고 광산을 폐쇄했다.
광산에서 먹고산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각자도생해야 했다. '정의로운 전환'은 그때도 지금도 없다. 이들은 다시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캐는 일이 아직 유효한 얼마 남지 않은 노동의 현장인 지하철 공사장이나 광통신을 까는 현장으로. 안산, 부천 등이 그곳이었고, 시화공단이나 안산공단 등으로 큰 규모의 광부들이 이주했다. 안산에는 강원도민 출신 17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세월호 희생자 중 재안산 강원도민 출신 주민 자녀 22명과 교사 1명이 있었다는 뼈저리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쓰라리게 들추어낸다.
태백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극 단체 '광부댁들'은 이들 고통의 대 이음을 우연으로 두지 않고 연대감으로 연결시키려 노력한다. '광부댁들'이 삭제된 광부의 역사에 대한 저항이자 되살림으로 만들어 낸 연극 <탄광촌의 봄>은 이제야 조명 받고 있는 사북 항쟁을 다루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잊지 않으면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 구성원에게 기억과 보존의 윤리를 각성시킨다.
광산은 필연적으로 환경 오염을 수반한다. 그러니 사라져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할 때 사라지는 것은 오염원만이 아니다. 광산에서 목숨을 걸고 광물을 채취한 노동자들의 땀과 피, 그리고 이들의 주검을 수시로 접하며 깊게 상처 받은 동료 광부와 가족들의 고통과 삶도 함께 사장된다. 그들의 노동과 고통의 대가를 사장 산업이라는 말로 손쉽게 치환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곁에 광산이 없어졌다고, 광부가 사라진 것도, 채굴 노동이 사라진 것도, 관련된 이들의 눈물과 한숨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외주 된 광산에서, 보이지 않는 '막장'에서, 광산 노동은 지금도 문명을 떠받치기 위해 갈아 넣어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한 시도 놓지 못하는 휴대폰에는 바로 이렇게 사라졌다고 믿는 광부의 노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은가.
<쇳돌>은 1부에 광산과 연루된 개인사를 다루며 모든 개인사가 사회사임을 강력히 각인시킨다. 저자의 아버지는 광부 노조의 기수로 거듭나며 비로소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에서 해방된다. 어머니는 연좌와 노조라는 이중고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양육과 돈벌이를 악착같이 수행해낸다. 고모와 여성 동료들의 비가시화된 노동 '선광부'와 그들의 생활사는 엄연히 존재했던 삶과 노동으로 생생히 부활한다. 2부는 이들 가족의 광산 이후의 삶을 다루며 이 역시 사회의 변화가 반영된 역사를 짚어낸다. 3,4,5부는 광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결코 타자화해서는 안 되는 광부의 노동과 역사를 밀도 높게 다룬다. 매우 흥미진진하다. 나는 이라영의 글을 좋아하는데, <쇳돌>을 그의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다. 또한 이르지만, 올해의 책으로도 주저 없이 선정하겠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게시 예정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