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냉소에도 16년 뚝심 연구… 73년 묵은 이론 풀어
2026.04.22 00:42
물리학 최고 권위 학술지 게재
“과학적 발견은 종종 어두운 방에 들어가 불을 켜는 것에 비유된다. 2차원 자성(磁性)의 발견이 바로 그 불을 켠 도약이었다.”
물리학 분야 세계 최고 권위 학술지 ‘리뷰스 오브 모던 피직스(Reviews of Modern Physics·RMP)’가 서울대 박제근 교수의 논문을 소개하며 쓴 문장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박 교수가 교신저자로 이끈 2차원 자성 리뷰 논문이 RMP에 게재됐다고 21일 밝혔다. 서강대 정현식 교수, 연세대 김재훈 교수, 미국 칼텍·MIT 연구자 등 한·미 8명이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RMP는 연구자가 스스로 논문을 투고하는 다른 학술지와 방식이 다르다. 편집부가 해당 분야에서 수십 년간 업적을 쌓아온 극소수 석학을 엄선해 특정 주제에 대한 집필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특정 분야가 어느 정도 성숙했을 때 그 분야의 모든 역사와 이론, 실험 결과를 총망라해 정리하는 논문만 싣는다. 해당 분야를 개척했거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 권위자에게만 집필 기회를 주기 때문에 검증된 거장들의 무대라는 평가다. RMP에 논문이 게재됐다는 건 해당 분야에서 최고로 공인받은 것이고, 교과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1929년 창간 이래 연간 약 40편만 싣는 물리학계에서 가장 문턱이 높은 학술지다. 97년 역사에서 한국인이 주저자로 이름을 올린 것은 고(故) 이휘소 박사, 문희태 KAIST 교수, 서울대 김진의 교수에 이어 네 번째다.
이번 논문은 88페이지에 참고문헌만 580개에 달한다. 단행본으로 엮으면 25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박 교수가 2010년부터 개척해온 이 분야의 탄생과 성과, 미해결 과제와 앞으로 방향까지 총망라한 사실상의 ‘국제 표준 교과서’다.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이나 전기차 모터를 돌리는 자석은 모두 원자가 겹겹이 쌓인 3차원 물질이다. 이걸 원자 한 층까지 깎아낸 2차원에서도 자석 성질이 살아남을지 증명하는 건 물리학계 난제였다. 1943년 노르웨이 과학자 라르스 온사거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했지만, 70여 년간 누구도 실험으로 증명하지 못했다. 박 교수팀은 2016년 삼황화린철(FePS₃)이라는 물질을 원자 한 겹씩 벗겨내 영하 118도 이하에서 자성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73년 묵은 이론이 서울대 실험실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같은 해 이 분야 첫 논문 4편을 쏟아내며 세계 물리학계에 새 지평을 열었다. 지금은 매년 1000편 이상의 후속 논문이 나오는 주류 분야로 자리 잡았다. 연구 결과는 초저전력 반도체, 양자 컴퓨터의 핵심 소자 등 산업계에서 차세대 반도체 공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잠재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박 교수가 45세에 이 분야에 뛰어들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외국에서 뜨는 연구나 따라가라”는 냉소가 대부분이었다. 2년간 아무 성과가 없었다. 포기를 고민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박 교수에겐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신념이 있었다. 그도 한때는 ‘패스트 팔로워’로 살았다. 40대 초반 네이처에 논문을 싣고 뿌듯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제학회를 돌며 깨달았다. “내가 찾아낸 건 남이 열어 준 방 안의 보석이었다. 결국 그 방을 처음 연 사람에게 공로가 돌아가더라.” 그렇게 16년을 버티며 자신만의 분야를 키워냈다.
그는 “한국 과학계는 20년 넘게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가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세계 최초로 개척된 분야는 드물다”며 “‘어디에 논문 실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분야를 처음 열었느냐’를 물어야 바뀔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젊은 학자들이 자신만의 깜깜한 방에 기꺼이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국가가 완벽한 방패가 돼야 한다”며 “내가 겪은 16년의 외로운 시간을 후배들은 겪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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