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동해 (8) 안과 근무 시절 무의촌 진료봉사… 의료선교 현장 체험
2026.04.22 03:05
서울 명동에 병원 개원했지만
동업자에 속아 거액 빚 떠안아
되레 소송 당하고 세무조사까지
전공의 4년차이자 안과 의국장을 맡았던 시절, 의국 재정 처리 문제로 과장님과 새로 부임한 주임 교수님의 미움을 사게 됐다. 주임 교수님은 내 진로와 관련된 모든 지원 서류에 서명을 거부하셨다.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백수 신세가 됐고 낙담한 심정으로 의사 신문의 구인 광고를 뒤적였다.
다급한 마음에 구인 광고를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던 곳 중엔 ‘실로암 안과’가 있었다. 한데 다음 날 목사님께서 날 부르시더니 당신이 실로암 안과 이사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목사님 소개로 실로암 안과에서 곧장 진료를 시작하게 됐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적처럼 이어지는 것 같다. 돌아보면 실로암 안과에서의 시간은 훗날 비전케어 사역을 탄생시킨 완벽한 예행연습이었다. 매월 버스를 타고 전국 무의촌을 도는 이동 진료를 도맡으며 척박한 국내 의료 선교의 현장을 온몸으로 배웠다.
무엇보다 이곳은 내게 수술대 앞의 영성을 가르쳐준 곳이다. 전공의 시절 수많은 응급 수술을 경험했지만 막상 전문의로서 오롯이 내 책임하에 혼자 메스를 잡게 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리 할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과거 백내장 수술 실패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으셨다. 그 아픔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내가 자칫 누군가를 내 아버지처럼 만들지도 모른다는 짓눌림이 있었다.
이때부터 수술대 앞에 설 때마다 반드시 환자의 눈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의 한계를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수술하는 동안 제 손끝을 친히 주관하시고 회복되는 동안 이 환자와 함께해 주셔서 생명의 빛을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는 환자를 위한 간구인 동시에, 부족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생명줄이었다.
이후 실로암 안과의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병원을 떠나 지인의 소개로 명동에 ‘명동성모안과’를 개원했다.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나는 동업자에게 속아 부도난 건물에 거액의 빚을 떠안은 채 병원을 열었다. 벼랑 끝 상황이었지만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점차 회복되는 경기와 국내 처음으로 새로운 장비로 라식 수술을 시작하면서 병원은 금세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의 빚을 갚아 드리고 신촌에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하는 기쁨도 누렸다. 매일 아침 직원들과 말씀 묵상(QT) 모임을 함께하고 서울역 노숙인 진료를 시작하며 정직한 예수님의 제자로, 선한 청지기처럼 살려 애썼다.
하지만 세속적 성공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개원 2년 차에 동업을 깬 쪽에서 소송을 제기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달 내내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까지 받게 됐다. 경찰과 검찰, 세무서를 오가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정직하게 진료하면 그만이라 여겼는데…. 법과 원칙이라는 매서운 회초리를 맞으며 나는 철저히 부서졌다.
하지만 이 혹독한 세상 공부는 훗날 재정 관리 기준을 잡고 병원과 비전케어 활동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또 돈을 얼마나 버느냐보단 어떻게 올바르게 쓰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눈물로 배운 이 진리는 나를 더 넓은 광야로 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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