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달라는 여섯 살 소녀는 왜 외면당했나
2026.04.19 07:00
영화 ‘힌드의 목소리’
집단학살 지켜보기만 하는 무력함 넘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고민해야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침공이 시작된 지 약 3개월 후인 2024년 1월 29일,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가자 남부의 텔알하와 주민들에게 긴급 대피 명령을 내린다. 하마다 가족이 탄 기아 차는 절멸이 예고된 도시를 급히 떠나던 중 탱크의 총격을 받고 통제 지역 한복판에 멈춰 선다. 차 안의 생존자가 적신월사(이슬람권 인도적 구호 단체) 팔레스타인 지사에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로부터 '힌드의 목소리'는 시작된다. 힌드 라잡이라는 이름의 여섯 살 소녀는 사촌들과 숙부 내외가 모두 사망한 채 자동차 안에 홀로 고립되고 만다.
힌드의 전화를 처음 받았던 적신월사 직원 오마르와 라나는 상부에 '조정'을 요청한다. 언제든 폭격당할 수 있는 가자 지구에는 이-팔 양국 정부와 국제 중재기구가 모두 합의한 안전 경로로만 구급차가 진입할 수 있다. 따라서 차로 단 8분을 가면 구출할 수 있는 아이의 음성을 그저 듣기만 해야 하는 상황. 영화는 이스라엘 탱크가 지척에 돌아다니는 도로 위에 갇힌 힌드와 적신월사의 실제 통화 녹취를 삽입한다. 이는 관객이 힌드가 겪은 끔찍한 시간을 구체적으로 상상케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가자 지구 바깥의 사람들이 겪은 지난하고 무력한 기다림의 시간에 온전히 이입하게 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날 아침 힌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대원들은 돌아갈 '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밤샘 격무에 지친 채로, 몇 달 동안 보지 못한 아이들을 떠올리며, 신원 미상의 구조 요청자가 통화 중 사망한 경우 적절한 심리치료를 받아 가며, 전쟁을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서 보고 듣지만 그들 역시 어디까지나 참극을 '함께' 겪고 있지 않은 사람들. "너무 무서워요, 데리러 와주세요"하고 수십 번을 애원하는 힌드의 목소리 앞에서 그들은 데리러 갈 테니 잘 숨어있으라며 기약 없는 약속을 욀 수밖에 없는 자신의 '멀리 있음'을 증오하게 된다. 라나와 오마르는 숨 가빠하고 눈물 흘리며 '내가 힌드 대신 저기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말은 말일 뿐 힌드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결국 힌드의 첫 지원 요청으로부터 몇 시간이 걸려서야 늘어지던 '조정'이 완료되고 안전 승인된 경로로 구급차가 들어서지만 곳곳에 무너진 건물로 길이 끊겨 있다. 간신히 힌드가 탄 차에 도달한 구급대원들은 "레이저가 우릴 조준하고 있다"는 말을 끝으로 연락이 끊기고 그와 함께 힌드와의 전화도 영영 종료된다. 12일 후 이스라엘 군이 철수한 이후에야 그들의 생사가 확인된다. 전원 사망한 힌드와 하마다 가족의 차는 총 355발의 총격을 받았다고 알려졌고, 베테랑 구조대원 마드훈과 자이노가 탄 구급차 역시 폭격당해 완파된 채였다.
구출 과정에서 적신월사의 조정 책임자 마흐디는 특권과 공로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자 지구에 직접 투입될 응급대원의 안전을 위해 프로토콜을 준수하기 때문에 힌드의 생존 여부가 명확해지기 전에는 구급차를 보내지 않으려 든다. 하지만 화난 대원들에게 마흐디는 절차주의적 관료제의 적폐를 표상하는 상사로 지목당한다. 마흐디가 애꿎게도 소극적인 악인처럼 그려지는 선택은 아쉬우나 실제로 힌드와의 통화 녹취가 전 세계에 공개됐을 때 국제사회가 일제히 사건을 외면하고 심지어 축소하려 했단 정황을 알고 나면 이 의아한 연출이 조금이나마 이해된다.
가디언, CNN, BBC 등은 힌드가 '살해당했다(killed)'는 서술 대신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found dead)'라 보도함으로써 친이스라엘 언론으로 비판받았다. 힌드를 어린아이가 아닌 '여성'으로 보도하는 성인화(adultification) 또한 피해자의 무고함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려는 전법으로 지적당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영화 속 마흐디란 인물은 분노의 에너지를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이다. 영화는 가자 지구 바깥의 우리 모두가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오마르와 라나가 되어주기를 촉구하고 있다. 급박하고 호소적인 톤은 세계가 그동안 그만큼이나 힌드의 목소리에 무심히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는 방증이리라.
앞서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 '노 어더 랜드'에서 팔레스타인 활동가 바젤 아드라는 강제 퇴거 명령을 받은 자신의 고향 마을 마사페르 야타를 빼곡한 영상으로 기록한다.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역사는 지난 80여 년간 그렇게 존속해 왔다. 팔레스타인의 땅을 빼앗고 존재를 불법으로 명명하는 것. 철거 혹은 대피로 불리는 인종 청소를 자행하는 것. 자신 대신 붙잡혀간 가족의 소식을 듣고 힘이 빠져 누워버린 바젤의 등 뒤로 지나가는 이스라엘의 중장비는 우리 눈에도 익숙한 HD현대의 것이다. 힌드에게 향하던 구급차의 피격 현장에서는 미국산 포탄의 파편이 발견됐다. 마사페르 야타의 주민들은 말한다. "도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범죄에 대한 법적 책무를 지세요." 무력감에 치를 떠는 선량한 관객 같은 편리한 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 역시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두 영화는 목청껏 소리 질러 전하고 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퇴거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