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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의 크립토네이션] 선제적 입법이 산업을 키운다

2026.04.19 07:06

은행중심 금융제도 고수한 일본, 디지털자산 전략화
정부정책 맞춰 금융사도, 기관투자가도 적극적 변모
미국은 잇딴 입법 통해 미래 신산업 선점 노리는 중
입법·규제 앞서야 기업도 행동…한국 입법 더 못 늦춰
[이데일리 이정훈 디지털자산센터장] 이웃나라 일본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은행 중심의 금융제도를 고수해 오면서 어느 나라보다 보수적이었던, 그래서 수십년 전부터 “저축에서 투자로”를 외쳐야했던 일본이 디지털자산 분야에서만큼은 확 바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안다고 자부했던 우리들은, 작년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엔화 스테이블코인을 합법화하고 첫 발행을 시작했을 때에도 “그 나라에선 배울 게 없다”며 그리 눈여겨 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하면서 ‘어쩌면 우리야말로 스스로 그렇게 평가절하했던 과거 일본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담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디지털자산 분야에 제대로 된 규율을 만들고, 그 틀 내에서 새로운 산업을 서서히 키워 나가고 있는 일본은 과거의 그들과는 물론 우리나라와도 다른 행보로 느껴집니다.

그동안 가상자산을 단순한 지급결제수단으로 간주해 자금결제법으로 규제해 온 일본 정부는 최근 이를 금융상품으로 규정하고 이를 규제할 금융상품거래법 개정안을 내각회의(우리의 국무회의)에서 의결했습니다. 의회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면 2027년부터 시행됩니다. 우리로 치면, 가상자산 사업자를 억지로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 틀 안에 끼워 넣었던 걸 잘못이라 인정하고 자본시장법으로 규율 법을 바꿨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에 맞춰 가상자산시장에 대한 규율 체계도 증권 수준으로 강화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하는 내부자 거래를 원천 금지하고, 가상자산 발행사에도 주식시장에 버금가는 연례 보고를 의무화했습니다. 사업자 규제를 전금법에, 투자자 보호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에 각각 끼워넣은 우리보다도 진일보한 규제 체계를 마련하게 되는 겁니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금융상은 “금융시장과 자본시장 변화에 대응해 성장자금 공급을 확대하고, 시장 공정성과 투명성, 투자자 보호를 확보하겠다”며 입법 취지를 밝혔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일본 정책당국은 가상자산 투자수익에 대해 현행 최고 50% 소득세율을 20% 단일 세율을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2028년 출시를 목표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도입을 약속하는 등 가상자산을 전통적인 투자상품 체계 안에 편입하려 전방위적으로 뛰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 정부의 노력은 어떤 결과를 만들고 있을까요? 다들 알다시피, JPYC는 지난해 10월27일 일본 금융청(FSA) 인가를 받아 자국 첫 규제형 엔화 스테이블코인을 출시했고, 3년 내 660억달러 규모 발행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직 거래량은 1억달러 조금 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엔화를 가진 글로벌 금융사들이 온체인 상에서 JPYC를 지급결제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고, 모르포 프로토콜에 상장돼 디파이 대출에 활용되는 등 미약하지만 인상적인 출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주 노무라와 그 가상자산 자회사 레이저 디지털이 작년 12월부터 올 1월까지 일본 기관투자가와 패밀리오피스, 공익기관 소속 투자 전문가 5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 기관투자가 가상자산 투자 동향 설문조사’를 봐도 가상자산을 대하는 일본 기관투자가들의 스탠스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후 1년 간 가상자산 전망이 긍정적”이라고 답한 비율은 1년 전 25%에서 31%로 높아졌고, “3년 내 가상자산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는 비율도 71%에서 79%로 늘었습니다. “스테이블코인 잠재적 활용처가 있다”는 응답도 63%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노무라홀딩스와 SBI홀딩스 등 일본 내에서 가상자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컸던 금융회사들은 일본 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글로벌 파트너들과 함께 가상자산 기반의 투자상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일본의 사례는, 일본 정부의 선제적 입법과 규제 구축 노력이 보수적인 시장참가자들의 행태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작년 하반기 스테이블코인을 합법화하는 지니어스 법안을 통과시킨 미국은 또 어떻습니까? 곧바로 스테이블코인 이자지급 여부나 불공정 행위 방지 등을 담은 후속입법인 클래리티 법안과 스테이블코인 등의 과세를 담은 세법 개정안, 기업들의 스테이블코인 보유량을 의무 공시토록 하는 회계제도 개선안 등을 발빠르게 준비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스테이블코인시장과 관련 인프라산업 등을 키워 보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지가 강하다는 방증입니다.

이렇다 보니 월가는 말 그대로 환골탈태 중입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코인 거래소인 OKX와 손 잡고, 코인베이스와 비자, 마스터카드와 협력하는 등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나 인프라 투자에서 단절돼 있던 전통금융과 블록체인업계는 파트너십 체결과 지분투자,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합종연횡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 태동하는 산업일수록 정부정책과 그에 따른 입법의 방향성이 시장참가자들이 가야할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법입니다. 이제서야 첫 업권법인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논의하면서 10여년 간 가상자산 거래소를 키워온 사업자들의 지분을 일정 수준 이하로 강제 매각토록 하겠다는 금융당국이 있는 국가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가상자산 거래소들처럼 사후 철퇴를 맞지 않으려면, 법과 규제가 없는 상황에선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 전 세계적인 스테이블코인과 자산 토큰화의 열풍은 미래 신산업을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의 싸움입니다. 미국만 해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커피 한 잔 사 먹지 못하지만,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거래 결제에 우선 쓰이고, 해외로 급하게 돈을 보내거나 국경간 결제를 해야 하는 기업과 개인들에게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금융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자국 통화가치가 불안정한 국가에서 대체 금융시스템으로 채택되고 있습니다. 토큰화는 또 어떻습니까? 전 세계 개인들에게 인기 많은 미국 국채나 미국 비상장주식들은 미국 금융사들이 선점하고 있고, 심지어 K팝 음원도 이미 해외 프로젝트들이 실물기반 토큰화자산(RWA)으로 거래하고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결제를 빠르고 저렴하게 할 수 있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토큰화는 종이로 발행된 주식과 채권, 눈에 보이는 실물자산을 온체인화하면 더 투명하고 싸게 거래할 수 있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는 금융시스템과 그 인프라 자체를 완전히 뒤바꾸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글로벌 자금 흐름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을 겁니다. 기술도 이미 완성에 가깝습니다. 완전한 도입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건 기술이 못 따라와서가 아니라, 입법과 규제, 소비자들의 신뢰가 아직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꿨던 인터넷이나 신용카드 결제 등을 보면 기술이 가장 앞섰고, 그 기술을 규율하는 입법과 규제가 마련돼야 기업이 그 뒤를 이었고, 소비자는 가장 늦게 행동했습니다. 디지털자산과 이를 매개로 한 웹3금융을 육성하겠다는 현 정부여당의 약속이 진심이라면, 지금이라도 국내 신산업을 키우고 해외 기업들의 시장 선점을 막아 내기 위한 입법과 규제에 나서야 합니다. 지금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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