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것만 공짜"…거지방·거지맵 켜는 '뉴 자린고비'
2026.04.18 04:31
'오늘 이 소비 괜찮을까' 물으며 절약
1만 원 이내 식당 추천 '거지맵' 인기
“녹차 티백 3,100원에 구매했어요.”
“두 번 세 번 우려먹읍시다.”
“마라톤대회 참가비 7만5,000원 지출 예정입니다.”
“그냥 걸으면 공짜인데요.”
이른바 ‘거지방’이라 불리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오가는 대화들이다. 일회용 티백도 아끼자는 제안에 ‘바람직하다’는 호응이 달리고, 거액 지출 계획에 ‘제정신이 아니’라며 짐짓 꾸짖기도 한다. 거지방이란 이름답게 자린고비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채팅방 운영자이자 ‘왕거지’라는 별명으로 활동 중인 한수민(26)씨는 17일 한국일보에 “물가가 치솟아 생활비 부담이 커졌다”며 “돈을 모으려 대화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씨는 출근길 프랜차이즈 커피 대신 저렴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있다.
이제 거지방은 일반명사처럼 통용된다. 카카오톡이나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거지방을 검색하면 대화방이 끝도 없이 나온다. 참여자들은 생활비 지출 내역을 공유하거나 특정 기간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은 ‘무지출’ 인증을 하면서 서로 절제를 독려한다.
일상이 된 극단적 절약
고물가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에게 짠테크(짠돌이+재테크)는 지지리 궁상으로 비하되던 인색한 습관이 아닌 똑똑한 생존전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오랜 경기 침체와 고환율, 미국·이란 전쟁까지 겹친 복합 위기 상황에선 합리적 소비보다 한 단계 나아간 ‘지출 최소화’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불안이 저변에 깔려 있다.
아낄 수 있는 건 모조리 아낀다. 대학생 김민아(24)씨는 “생수 값도 아까워 학교 정수기를 이용하고, 외식 대신 편의점 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한다”며 “밖에 나가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기분이라 약속도 잘 잡지 않는다”고 말했다. 직장인 문모(24)씨는 “옷값이 너무 비싸 대학 신입생 때 산 옷을 여전히 입고 있다”고 했고, 대학원생 정예은(24)씨도 “교통비 몇 천 원이라도 아끼려 40분 이내 거리는 무조건 걸어다닌다”고 귀띔했다.
더는 졸라맬 데가 없을 것 같아도 찾아보면 또 있다. 취업준비생 이지민(25)씨는 “서울에서 본가가 있는 경남 김해까지 KTX 왕복 요금이 10만 원 넘어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참고 있다”고 털어놨다. 김세린(26)씨는 “손목닥터 9988 걷기 앱으로 하루 8,000보 이상 걸으면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서울페이 포인트를 줘서, 열심히 걸어 식비에 보태고 있다”고 말했다.
플랫폼으로 진화한 짠테크
최근에는 거지방에서 파생한 ‘거지맵’도 등장했다. 거지맵은 한 끼에 8,000원 이하(서울 강남·여의도 등 1만 원) 식당을 지도로 알려주는 플랫폼이다. 5,000원짜리 돈가스나 4,000원짜리 칼국수처럼 가성비 높은 식당 정보를 제공해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과 사회초년생 사이에 반응이 뜨겁다. 성신여대 학생 김태영(22)씨는 “학식 가격도 오르는 추세라 거지맵을 보고 더 저렴한 식당을 찾는다”며 “가성비뿐 아니라 다른 이용자의 평가도 확인할 수 있어 매일 이용한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거지맵은 지난달 20일부터 웹사이트 형태로 운영되다 이달 10일 앱으로도 출시됐는데 엿새 만에 다운로드 2만1,500회를 기록했다. 웹사이트와 앱을 더한 누적 이용자 수는 131만 명에 달한다. 거지맵 개발자 최성수(34)씨는 “집은 못 사더라도 한 끼에 몇 천 원이라도 아껴 저축이나 투자로 이어가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거지맵은 뜻밖의 파급 효과도 낳았다. 거지맵에 프랜차이즈보다 소규모 개인 식당이 주로 등록되다 보니 골목상권 활성화에 일조하게 된 것이다. 대학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30)씨는 “배달앱은 광고비와 수수료가 매출의 15%에 달하는데, 거지맵은 비용 없이 식당이 홍보돼 일석이조”라고 흐뭇해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이 일시적 유행이 아닌 생존형 소비 구조 재편으로 본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과거 욜로(YOLO·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자는 뜻)나 과시적 소비 문화에서 자산 격차를 체감한 청년들이 이제는 함께 아끼며 버티는 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다”며 “경기 불황 속에 절약 문화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거지방’ ‘거지맵’이라는 표현을 두고는 빈곤층 희화화나 청년 세대의 자기 비하로 인식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경제적 불안을 유머와 자조의 언어로 소비하는 문화가 반영된 것”이라면서도 “청년들이 자신을 최하층으로 비유하는 표현이 일상화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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