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오늘]당면한 일
2026.04.15 19:55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첫 문장이다. 본래 “꽃이” 아니라 “꽃은”이었다고 한다. 작가는 담배 한 갑을 태우며 고민했고, 끝내 “꽃이” 되었다. 문장 하나, 아니 조사 하나에도 작가는 애달아한다. 저 첫 문장도 아름답지만, 내가 작가의 문장 중 가장 사랑하는 대목은 <남한산성>의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이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형 김상용이 보낸 서신을 통해 임금의 파천을 알게 되었고, 이내 남한산성으로 길을 잡는다. 관직에서 물러났음에도 김상용은 “빈궁과 대군을 받들어 강화”로 간다. 그리고 예조판서인 동생에게는 “스스로 몸 둘 곳”을 알 것이라 일러준다.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는 형제의 앞날에 대한 예견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메타포다.
그레이스가 눈을 뜬 곳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선 안. 동행한 두 사람은 무슨 이유에선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고, 왜 우주선에 타고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온 우주선을 샅샅이 뒤진 그레이스는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알아낸다. 더불어, 우주선에서 죽을 운명이라는 걸 깨닫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헤일메리호에 탄 이유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태양이 병들었고, 그에 따라 지구는 대재앙의 위기에 처했다. 태양의 온도를 떨어뜨리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찾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즈음 그레이스 앞에, 지극히 지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괴우주선과 괴생명체가 나타난다. 역시나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어느 별에서 온 로키였다. 그레이스와 로키는 대화가 가능해졌고, 서로 도우며 “당면한 일을 당면”한다. 최근 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이야기다. 영화도 좋지만, 앤디 위어의 원작 소설의 감동도 제법 크다.
영국 작가 제임스 매슈 배리가 1911년 발표한 <피터 팬>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24년 무성영화를 시작으로 여러 번 영화로, 또 애니메이션과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면서, 남녀노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어느 날 찾아온 피터 팬의 제안으로 웬디, 존, 마이클 삼남매는 네버랜드로 모험을 떠난다. 네버랜드는 어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한마디로 동심의 세계다. 하지만 세상 어디나 동심을 파괴하는 존재들이 있듯, 네버랜드에도 동심 파괴자가 있었다. 후크 선장과 해적 일당이다. 피터 팬에게 한쪽 손을 잃은 후크 선장의 복수심은 끝이 없었고, 최후의 일전을 감행한다. 하늘을 날 수 있는 피터 팬을 그 누가 당할쏘냐. 또한 피터 팬이 질 수 없는 이유는, 세상 모든 동심의 응원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웬디 삼남매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피터 팬도 안주할까 고민하지만, 다시금 네버랜드로의 모험을 감행한다. 피터 팬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동심의 세계를 지켜야 하는 “당면한 일을 당면”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당면한 일이 있다. 누군가는 지구를 구할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어떤 이는 그 계획을 현장에서 충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작가는 글을 써야 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정치가는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 이외에도 저마다의 삶의 현장은 셀 수 없이 많으니, 우리 모두는 그 현장에서 “당면한 일을 당면”해야 한다. 그리하면 세상은 아주 조금씩 총천연색으로 바뀔 게 분명하다. 몇몇 악당이 분탕질한 어수선한 세계를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더라도, 우리는 지금 당면한 일을 당면하며, 거기서부터 세계 평화를 시작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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