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빡셀줄은'…3조 굴리는 '연기금 큰손' 하루는 이렇습니다 [하루만]
2026.01.07 21:01
"매일 링 위에 선다"…해외주식 3조 굴리는 연기금 큰손의 조언
염재현 공무원연금공단 해외투자팀장
'3대 연기금' 펀드매니저 하루 밀착 취재
금융권 직업은 수두룩하다. 접근 난이도는 높은데 막상 주어진 정보는 많지 않다. [하루만]은 이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베일을 걷어 보려 한다. 증권·운용사부터 정부 부처까지, 또 말단 직원부터 기업체 사장에 이르기까지 직종과 직급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의 '하루'를 빌려 취재한다. (지난 기사 보기: 미 화상회의부터 일정 7건 쉴 새 없이 소화…유니콘 조력자의 삶 [하루만])
"따르릉!"
염재현 공무원연금공단 자금운용단 해외투자팀장(사진)의 사무실 전화기가 오전 7시부터 끊임 없이 울립니다. 해외 시황을 설명하고 투자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해 염팀장을 찾는 국내외 증권사 직원들의 전화입니다.
공무원연금은 국민연금·사학연금과 함께 국내 3대 연기금 중 하나입니다. 공무원이 퇴직한 뒤 받을 연금 급여를 충당하기 위한 책임준비금으로, 매달 공무원들의 월급에서 일부를 떼고 정부도 적립금을 보태 만들어집니다. 이 돈을 주식이나 채권 같은 곳에 투자해서 더 불리는 게 공무원연금공단 직원들의 일입니다. 불어난 돈은 은퇴한 공무원들이 매달 연금으로 받습니다.
지난해 10월 현재 공무원연금의 총 운용자산은 14조2700억원입니다. 이 중 염 팀장이 이끄는 해외투자팀이 굴리는 자금 규모만 3조3449억원(해외 채권·해외 주식)에 달합니다. 한국 시장 하나만 놓고 봐도 오를지 내릴지 판단이 쉽지 않은데, 염 팀장은 여러 나라 시장을 보며 투자에 임해야 합니다. 그는 "스무살 때부터 혼자 배낭 메고 세계를 돌아보다 해외 투자의 길로 접어 든 만큼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자리에 커다란 지구본을 뒀다"며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를 매일 생각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염 팀장의 하루를 빌려 국내 자본시장 '큰손' 연기금 펀드매니저의 삶을 체험했습니다.
오전 6시30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서울상록회관 빌딩 10층. 5대의 모니터가 놓인 염 팀장의 책상은 말끔히 정돈돼 있습니다. 액자와 책 몇 권을 빼고는 그 흔한 개인용품도 없습니다. 옆에는 팀원 3명과 둘러앉을 수 있는 작은 회의 탁자가 전부입니다.
막 출근한 염 팀장은 커피 믹스를 한 잔 타서 자리에 앉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밤새 닫힌 시장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인터넷 브라우저 창에는 미리 설정한 외신 주요 사이트들이 자동으로 열립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깊이 있는 분석 글을 읽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핵심 소식을 빠르게 파악할 때, 가디언지는 사회 전반의 이슈까지 읽고 싶을 때 찾는다고 합니다.
국내외 금융사로부터 온 이메일도 열어봐야 합니다. 이날자로만 120여 건이 와 있습니다. 싱가포르 액티브 운용사의 미팅 제안부터, 외국계 증권사 브로커가 정리한 글로벌 투자은행(IB)의 투자의견 요약본, 국내 증권사가 취합한 해외 주요국 시황과 월간 전망자료 등 읽을거리가 빼곡합니다. 염 팀장은 자료들을 훑으며 시장의 큰 흐름부터 정리했습니다.
정보의 과잉을 어떻게 대처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시간을 들여 깊이 있는 자료를 공부하다 보면 자신만의 분간 능력이 생긴다. 일단 정부의 홍수에 단단히 빠져보는 게 중요하다"고 답했습니다.오전 8시 한화투자증권과의 모닝 세미나를 위해 염 팀장은 팀원인 조원진 과장과 함께 한 층 아래 회의실로 이동합니다.
한화투자증권 소속 브로커인 김도균 글로벌영업팀장이 한상희 글로벌리서치팀장, 임해인 책임연구원과 함께 자료를 가득 들고 찾아왔습니다.
한 팀장은 프레젠테이션을 띄우고 '2026 연간 전망'을 주제로 미국과 중국 시장에 대한 전망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최근 시장의 '뜨거운 감자'인 AI 거품론에 대해 "지금이 버블이냐 아니냐를 다투는 건 의미가 없다. 버블임을 인정하고 현 구간이 어딘지를 따져봐야 한다"며 "닷컴버블이 터진 2000년인지, 부풀고 있는 1990년 후반인지 보면 되는데 2026년이 2000년은 아닐 거라는 게 제 결론"이라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그 사이 상승분을 취하려면 미국 주식 비중을 적극 늘려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한 팀장 발표에 이어 임 연구원의 선호 업종·종목 설명까지 끝나자, 염 팀장과 조 과장은 세부 내용을 파고드는 '송곳 질문'을 던졌습니다.
"(미국 추천주로 제시한) 슈뢰딩거나 GE 헬스케어의 경우 연초 이후로 절대와 상대 수익률 모두 마이너스인데, 그 정도로 확신이 있나요?" (염 팀장)
"GE 헬스케어는 수익이 안정적으로 나오고 있는 가운데 주가가 빠지면 상대적으로 주가 매력도가 높다고 생각됩니다." (임 연구원)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때때로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모닝 세미나라고 하면 일방적인 강의를 떠올리기 쉬운데, 현장에서 보니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 브로커가 한자리에 모여 흥미로운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토론의 시간'에 가까웠습니다.오전 9시. 자리로 돌아온 염 팀장은 직원들이 보내 준 일일 성과표를 확인합니다. 전날의 성적표인 셈입니다. 해외 주식·채권 각 부문에서의 운용 상품들을 EMP(ETF managed portfolio)형과 액티브형으로 구분해 '일일·최근 1개월·3개월·6개월·연초 이후·1년' 수익률을 매일 확인합니다.
"공제회들은 각 자산별 비중이 천차만별인 반면 연기금은 분산투자를 중시하는 특성상 주식, 채권, 대체투자가 동일하게 1:1:1 비중으로 자산배분돼 있습니다. 위험 관리를 하면서 초과 성과 1~2%를 내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때문에 벤치마크 지수 수익률을 과도하게 이탈해 부진한 펀드들이 있는지를 봐요. 요주의 펀드는 직원들과 회의해서 이유를 분석해 보고, 그래도 해소가 안 되면 담당자를 불러서 부진 이유와 대응 계획을 묻기도 합니다. 하루 수익률은 흐름을 보는 정도로 활용하고, '연초 이후'와 '1년' 성과를 가장 중요하게 확인합니다."
오전 9시35분, 염 팀장에게 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모닝 콜'입니다. 증권사의 법인 브로커 직원이 일본장과 호주장 개장(오전 9시)을 즈음해 전화를 걸어 전날 시황과 오늘 주요 재료들, 투자 아이디어를 미리 얘기해주는 겁니다. "해외 주식 브로커들은 주식 주문을 받아서 체결하는 것 외에도, 애널리스트들처럼 해외 시황을 분석해 기관들에 알려주고, 미팅을 주선해주는 등 업무 폭이 훨씬 넓다"고 염 팀장은 설명했습니다
정 부문장은 이날 템플턴의 100% 자회사인 '클리어브릿지'의 상장 인프라 전략 상품을 들고 왔는데요. 그는 "포트폴리오가 어느 정도 구축된 상태에서 '코어(핵심) 전략'만 집중하면 시장이 빠질 때 다 같이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일부 비중은 '위성 전략'으로 상장 인프라 펀드를 활용하면 좋다"고 귀띔했습니다. 위성 전략이란 포트폴리오 70~90%가 시장지수를 추종하는 대신, 나머지 비중을 초과 수익을 내기 위해 특정 섹터나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뜻합니다.어느덧 점심시간입니다. 염 팀장은 차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맞은편 건물의 권투장으로 향합니다. 그는 "아침 일찍 업무가 시작되는 탓에 운동 시간을 따로 내기 어려워 점심 식사를 거르거나 간단히 때우고 복싱하러 온다"며 "벌써 햇수로 18년째 복싱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염 팀장은 단계를 밟아 줄넘기, 섀도 복싱, 샌드백, 매스 스파링을 했습니다. 복싱장에 크게 걸려있는 타이머가 텀을 두면서 끊임없이 '3분'을 재는데요. 이 3분간은 하고 있는 운동을 멈춰선 안 된다는 게 규칙입니다. 복싱장 링 위에서의 시간은 '지옥의 3분'이라 불릴 정도로 힘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링 위에 올라가기 전 예열 운동을 하는 염 팀장의 얼굴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눈에 안 보이는 듯이 오로지 복싱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는 복싱에서 삶을 본다고 합니다. "링 위에 올라가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긴 3분이에요. 타이머 종이 울리기 전까진 견뎌야 해요. 삶도 견디는 거잖아요. 이겨내고, 버티면서 짜릿함을 얻는 거 같아요."사무실로 복귀한 염 팀장은 오전의 피로가 가신 듯 여유로움을 되찾았습니다. 오후 2시부터 피데스자산운용의 운용성과 보고 미팅이 있어 다시 수첩을 들고 회의실로 이동합니다. 2006년 베트남에 진출해 20여 년간 '베트남 투자' 한 우물만 판 피데스운용은 작지만 매운 운용사입니다. 공무원연금이 해외간접주식 운용을 맡긴 운용사들 중 연초 이후 수익률 1위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피데스운용의 송두희 주식운용팀장과 윤대권 관리팀 대리가 긴장한 표정으로 10페이지 분량의 '2025년 4분기 공무원연금 해외간접주식 운용계획' 자료를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분기마다 찾아와 '어떻게 공무원연금 자금을 굴리고 있는지' 보고합니다.
"지난해 말 펀드 설정 이후로 '피데스선진국액티브주식'의 누적 수익률은 21.78%로 벤치마크 대비 3.62%포인트 웃돌았습니다. 지수보다 일본과 미국의 비중을 확대해 운용했는데, 그 전략이 잘 통한 것 같습니다." (송 팀장)
"처음 투자할 때 벤치마크 대비 1%포인트 정도겠거니 했는데 성과가 기대 이상입니다." (염 팀장)
그의 임무는 '주요 뉴스 전달'입니다. 그가 가져온 6페이지 분량 자료엔 요약 형태로 △올해 반도체 산업 전망 △글로벌 반도체 유망 기업 △최근 기술 경향 △월가 리서치회사의 참고할 만한 보고서 등이 담겼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시간은 15분 남짓.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직접 발품을 팔아 얼굴을 비추는 것 역시 증권사 브로커의 일입니다.
숨 돌릴 틈 없이 오후 5시 예정된 한국 내 유일 중국계 증권사인 CMS증권과의 미팅을 준비합니다. 최호범 부대표와 박신영 수석연구원은 '올해 '중국 A주'(중국 본토 상장주식) 투자전략'을 주제로 30여 분간 설명했습니다.
"올해부터는 A주 상장사들의 이익이 크게 개선될 전망입니다. 다만 섹터별 차별화가 심해 A주는 지수보다는 섹터로 접근해야 합니다. 올해는 공정기계·ESS 등 '시클리컬(경기민감주)'과 컴퓨팅과 반도체 장비 등 'AI 인프라', 호텔·리테일·여행 등 '내수 회복 관련주' 등을 추천합니다." (박 연구원)
염 팀장은 "중국 시장은 가파른 반등세에 올인했다가 손해 본 경험이 있어서 기관으로서도 판단이 잘 안 서는 시장"이라며 "(말해 준 추천 업종 중) 소비재는 올해 턴어라운드보단 부진이 계속될 가능성은 없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박 연구원은 "매크로 데이터가 안 좋지만 여행과 호텔 등 일부 영역에선 수요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어서 선별적 접근 시엔 상승 여력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올해는 본토 시장인 과창판에 IPO가 많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항셍테크보단 과창판 주식들을 봐야 하나요?" "최근 부진한 팝마트도 소비재로서 추천하시나요?" 기자도 이때다 싶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습니다. 박 연구원은 "항셍테크는 이름은 테크지만 소비 종목들이 많고 AI 밸류체인 종목들은 본토에 많다"며 "팝마트의 경우엔 악재가 충분히 반영됐다고 보기 때문에 오는 2월 호실적을 전제로 투자 매력도 높다고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염 팀장은 "투자업계에서 공공기관, 자산운용사, 증권사의 전문가들과 뜻을 모아 전범기업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역사를 우리가 먼저 알고 마음에 새기자는 취지"라며 "투자자로서 전범기업을 알고 투자하는 것과 모르고 투자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날의 화두는 '쿠팡'이었습니다. 최근 개인정보 유출사고에 휘말린 쿠팡이 미흡한 대처로 소비자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는 만큼, 연구회도 시의성에 맞게 전범기업 연구회에서 확장적으로 쿠팡과 같은 사례를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기관투자자로서 '사회적 투자'를 고민하는 만큼 쿠팡처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기업들에 대해서도 공부하면 좋을 거 같아요." (남경윤 과학기술인공제회 매니저)
화상회의 상대는 이탈리아 최대 독립 투자은행(IB)인 '에퀴타'(Equita)의 직원들. 이들과 유럽증시에 대한 내년도 전망을 공유합니다.
특히 이탈리아의 슈퍼카 기업 페라리 주식이 이날 논의의 중심이었습니다. 페라리 주가는 지난 수년간 가파르게 상승세를 타다가, 지난해 2월부터 꺾여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에퀴타는 페라리를 오래간 '톱픽(최선호주)'으로 꼽아왔는데, 최근 톱픽 명단에서 뺐다고 합니다. 염 팀장이 "페라리가 올해 상승 여력이 없겠냐"고 물었고, 에퀴타 분석가들은 "실적 개선 조짐이 보이지 않아 이제는 좋게 보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1시간의 화상회의 내내 염 팀장 옆자리를 지켰지만, 메모장에 남은 건 단어 몇 개뿐입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오가며 대화를 주도하는 염 팀장의 모습에서 해외 투자 총괄을 맡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습니다.
오후 10시를 넘겨서야 염 팀장의 하루 업무가 끝났습니다. 어둑해진 사무실 문을 마지막으로 나서는데도 염 팀장의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그는 "내일은 세계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부담보다는 설렘이 더 크다"며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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