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중국이야 일본이야… 한 걸음에 두 나라를 만나다
2026.04.10 02:39
인천에 관한 별칭은 부정적인 게 많다. ‘짠물’이 대표적이다. 오죽했으면 과거 인천시립박물관이 ‘인천 짠물에 대한 해명’을 주제로 전시회를 연 적도 있다. 짠물은 인천 사람이 인색하다는 데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인천에 염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획 의도가 깔린 전시였다. 문제는 당구장에서 이른바 사기 당구로 크게 물리게 한 이들 대부분이 인천 출신이었다는 말이 여전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짠물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희석할 수 있는 명소가 있다. 바로 인천 중구 관동1가 일대에 자리한 ‘인천개항누리길’이다. 이곳에는 근대 개항기부터 이어져 온 항구도시 인천의 모습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개항누리길은 중구가 2006년부터 운영해온 4.1㎞의 도보관광코스다. 140여년 전 개항기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간직한 개항장 권역을 둘러볼 수 있게 조성됐다. 시작점은 경인국철과 수인선이 만나는 인천역이다. 9일 오후 1시쯤 인천역 앞 광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강렬한 붉은색을 자랑하듯 우뚝 선 중국식 전통대문 ‘패루’다. 8m 높이의 패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패루를 지나가면 개항누리길의 대표 코스인 ‘차이나타운’이 펼쳐진다. 차이나타운은 1884년 조성된 청국 조계(외국인 거주지역)로부터 140여년 역사를 품은 ‘한국 속의 작은 중국’으로 불린다. 차이나타운은 중식당으로 유명하다. 짜장면 발상지로 이름난 중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 거리에선 어린이들 손에 월병과 공갈빵 같은 간식이 들린 모습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삼국지를 벽화로 표현한 ‘삼국지 벽화거리’, 중국식 사찰인 ‘의선당’ 등도 이국적인 정취를 더한다.
중구청 주변으로 발을 옮기면 일본풍 거리 등 개항장 문화지구가 나온다. 이곳은 1883년 인천 개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근대 문명의 발자취를 따라 일대를 걸으면 준공된 지 130여년이나 지난 르네상스식 석조물 ‘일본18은행’, 외국인 사교클럽으로 조직된 ‘제물포구락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근대 건축물에선 열강의 각축장이 됐던 격동의 인천을 볼 수 있다.
옛 건축물을 활용한 곳이 많다. 100년 이상 지난 건축물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고증 등을 거쳐 리모델링된 음식점·카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어우러지며 청년들의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개항누리길 상점가’와 ‘신포국제시장’도 지나칠 수 없다. 청년 창업가 등이 모여 형성된 상점가는 50년 이상의 맛을 간직한 노포들과 서로 어울리며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신포시장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며 만들어지는 닭강정 등 먹거리가 군침을 돌게 만든다. 이밖에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 동화 속 주인공 등을 벽화와 조형물로 꾸민 ‘송월동 동화마을’도 개항누리길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서울에서 온 박현진(29·여)씨는 “드라마 ‘도깨비’에 나온 장소 등을 찾아본 것도 개항누리길의 큰 재미”라며 “미리 준비한 맛집 리스트까지 다 찾아가려면 하루로는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개항누리길은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구시가지에 불과했다. 몇몇 노포만 남아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지키던 곳이었다. 개항누리길의 변화는 역사와 문화의 복원을 통해 이뤄졌다. 매년 이곳에서 열리는 ‘인천개항장 문화재야행’에는 1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린다. 청년 창업자들도 하나둘 자리 잡으면서 도시 재생의 상징이 됐다.
다만 해결해야 할 문제도 적지 않다. 개항누리길을 구성하는 콘셉트가 다채롭다 보니 상권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큰 행사가 열릴 때마다 일부 상권은 소외되기도 한다. 앞서 중구가 야외 테이블을 마련해 영업할 수 있도록 지원한 ‘인천개항누리길 포차거리’ 사업의 경우도 대상에서 빠진 상인들의 매출이 폭락하는 문제가 빚어졌다.
상인 간 갈등이 커지면서 LED 설치 등 중구의 예산 투입을 두고 특혜 논란이 벌어진 적도 있다. 개항누리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차이나타운, 신포시장 등으로 개항누리길의 상권이 다 나뉘어 있어 서로 시너지를 내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포차거리 확대·개항기 의상 체험… 우리만의 콘텐츠 꾸준히 브랜딩”
박유진 개항누리길 상점가 상인회장
박유진 개항누리길 상점가 상인회장
인천개항누리길은 걸어서 천천히 둘러보려면 3시간 이상 필요하다. 차이나타운, 개항장거리, 신포국제시장 등 다양한 상권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 상권이 서로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민간 차원에서 진행 중이다.
박유진(사진) 개항누리길 상점가 상인회 회장은 9일 “개항누리길은 수십년간 자리를 지켜온 노포와 감각적인 청년 상인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곳”이라며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며 과거와 현재가 함께 숨 쉬는 거리가 바로 개항누리길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개항누리길 상점가는 신포국제시장, 차이나타운 등을 잇는 중간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며 “다양한 야간 콘텐츠 등을 운영하면서 유동인구가 자연스럽게 주변 골목까지 퍼져나갔고, 이를 통해 골목형 상점가 2곳이 인근에 새롭게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상인회에는 57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상권 활성화와 연계를 위해 여러 자생형 사업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에는 심폐소생술(CPR) 교육, QR 주문 시스템, 미성년자 확인 팔찌 등을 도입했다. 또 ‘개항무비나잇’ ‘씬나사운드 뮤직페스티벌’ 등을 통해 문화가 흐르는 거리를 만드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특히 ‘인천개항누리길 포차거리’ 사업은 중구와의 협의 등을 거쳐 기존 우현로 35번길에서 39번길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신포시장과 개항누리길을 잇는 동선을 만드는 등 많은 상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신포 제2공영주차장 출구 동선 조정, 차 없는 거리 지정 등 상인들이 체감할 수 있는 인프라 개선도 추진 중이다.
박 회장은 “상인회 설립 10주년에 맞춰서는 ‘문화관광형 시장’에 도전할 예정”이라며 “포차거리 확대는 물론 개항기 의상 체험 등 우리만의 특색을 살린 콘텐츠를 꾸준히 브랜딩해 개항누리길 내 상권들과 시너지를 내겠다”고 말했다. 또 “인천에서 문화가 가장 아름답게 흐르는 거리라면 누구나 개항누리길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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