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항공 '틈새시장 강자' 스위스…배경엔 혁신문화
2026.04.08 04:00
"정부는 규제하지 않는다…우리는 실패해도 된다"
(루체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스위스 루체른 인근 엠멘에 있는 우주항공 기업 '비욘드 그래비티' 건물 앞에서 직원이 지나가고 있다. 2026.4.8
jk@yna.co.kr
(취리히·로잔=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미국 서부 개척 시기 금광을 향해 벌어진 '골드러시' 시절, 진짜 돈을 번 것은 광부들에게 청바지를 판매한 리바이스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민간이 우주로 진출하는 '뉴 스페이스'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에는 직접 로켓을 만들거나 쏘지는 않아도 우주항공 생태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해 미래 먹거리를 선점해 나가는 나라가 스위스다.
정밀 고부가가치 산업의 전통에서 출발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 장려의 문화와 효율적 정부 운영을 추가해 우주항공 산업의 숨은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욘드 그래비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로켓 페어링 제작·우주파편 제거…"스위스 없이는 NASA도 로켓 못 쏴" 스위스는 유럽우주기구(ESA) 창립 회원국으로 다양한 우주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정부나 기업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우주 로켓을 고안하고 발사하는 나라는 아니다.
그런데도 우주 로켓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들이 스위스에서 만들어지고 있어 "스위스가 없이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도 로켓을 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찾은 루체른 근교의 우주항공 기업 '비욘드 그래비티'가 대표적이다. 이 업체는 세계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로켓 페어링(덮개) 제작 전문 기업이다.
로켓 페어링은 로켓의 가장 앞에 있는 부분이다. 위성을 싣고 우주로 향하는 로켓은 목표한 궤도에 도달했을 때 페어링이 분리되면서 떨어져 나가고 위성을 궤도에 올려두게 된다.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로켓 페어링만 전문으로 하는 다른 업체가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로켓 산업은 가령 자동차처럼 분업화가 자리 잡은 분야가 아니다.
그러나 비욘드 그래비티는 NASA의 벌컨·아틀라스 로켓, ESA의 아리안6·베가C 로켓 페어링 제작을 수주·공급한 데 이어 최근에는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H3 로켓의 페어링까지 공급했다.
일본은 전후 1950년대부터 로켓을 개발해오면서 자주 기술 확보를 극도로 중시해왔는데 사실상 처음으로 로켓 첨단부 제작을 외부에 맡긴 것이어서 이를 계기로 비욘드 그래비티의 기술력과 비용 효율성에 대한 주목도가 한층 높아졌다.
(베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당시 달에 설치됐던 스위스제 태양풍 구성 측정기의 일부. 스위스 베른대학교에서 보관 중이다. 20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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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파편(space debris)을 청소하는 업체 클리어 스페이스도 스위스 우주산업 생태계의 상징 중 하나다.
현재 우주 궤도에는 인공위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성을 쏘아 올리고 남은 로켓 잔해 등 파편 수백만 개가 떠다닌다. 장차 우주 시대가 가속할수록 이들 파편의 위험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클리어 스페이스는 이들을 수거해 청소하는 우주 로봇을 제작하는 업체다. 스위스의 공학 명문 로잔연방공과대학교(EPFL)에서 우주 연구·교육을 총괄하는 조직인 '스페이스센터'를 토대로 탄생한 기업이다.
대학교 연구실의 프로젝트가 실제 비즈니스 모델로 이어진 사례인데, 주로 국가 단위 대형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우주 파편 제거의 상용화라는 측면에서 우주 산업계 전반에서 클리어 스페이스에 쏠리는 관심이 적지 않다.
스위스가 우주 시장에서 숨은 강자로 활약한 것은 인류의 우주 활동 초창기부터였다.
달에 첫발을 딛고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역설했던 닐 암스트롱은 미국인이고 그가 탑승한 아폴로 11호가 미국 우주선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위스 베른대학교 소속으로 우주 탐사 장비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니콜라스 토마스 교수는 지난달 25일 "달 표면에 놓였던 최초의 우주 장비, 즉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들이 달에 설치한 첫 번째 장비는 바로 이곳 베른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태양풍 구성 측정기라 불리는 알루미늄 박막 형태의 장비가 그것이다.
토마스 교수는 "(아폴로 11호 비행사) 버즈 올드린이 달에 설치했던 알루미늄 조각을 아직 우리가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며 "난 그 조각이 스위스 국기라고 생각한다"고 자랑했다.
(취리히=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스위스 취리히 인근 '이노베이션파크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우주항공센터(CSA)
지원하되 규제하지 않는 정부…"스위스의 성공 요인" "정부가 규제요? 정부는 규제하지 않습니다. 취리히주는 전략적 조율과 재정적 지원, 정치적 안정성을 제공합니다."
이런 기업들이 연이어 탄생하는 배경으로는 스위스 고유의 혁신 추구 문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작은 정부의 전통이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스위스 연방정부 차원에서 혁신 생태계 강화를 위해 조성한 '스위스 이노베이션파크'에서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노베이션파크는 스위스 전역에 6곳이 마련돼 있다.
취리히 인근 뒤벤도르프에 위치한 '이노베이션파크 취리히'에는 취리히대학교(UZH) '스페이스 허브'가 주도하는 스위스 우주항공센터(CSA) 인프라가 자리하고 있다. CSA는 7개 학술기관 및 재단, 스위스 공군을 포함한 4개 공공기관이 참여해 뉴스페이스 경제를 연구하고 각종 실험을 수행하는 곳이다.
CSA에 참여하는 취리히대의 코라 틸 교수는 지난달 23일 한국 취재진과의 문답 과정에서 여러 기관 간 협업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부가 어떤 식으로 규제·개입하느냐는 질문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문제를 말하는 거냐"고 되물으면서 "모든 것은 계약에 명시돼 있고 계약에 의해 보장된다"며 정부가 지원 외에 규제·감독 측면에서 어떤 역할을 갖지는 않는다고 부연했다.
(로잔=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교의 조반니 라니에리(오른쪽)가 탐사 로봇을 설명하고 있다. 20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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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기업 현장에서 혁신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면 정부가 이를 지원해주는 상향식(bottom-up) 접근, 그리고 정부 지원이 제공되더라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산업의 자생력을 강화한다.
스위스 외교부의 마르쿠스 라이트너 아시아·태평양 국장은 "무엇이 다음번의 거대한 흐름이 될지 예측하기에 정치인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걸 비즈니스와 경제계 혹은 대학의 판단에 맡긴다"고 설명했다.
틸 교수는 "이러한 상향식 접근 방식 덕분에 우리 정부는 산업계에 단순히 법을 강요하기보다 산업계의 요구를 이해하기 위해 긴밀하게 협력한다"며 "이것은 모든 이가 혁신할 수 있는 공간을 주며, 모든 것이 매우 실용적"이라고 강조했다.
육성할 산업을 정해놓고 재원을 쏟아붓는 큰 정부가 아니라 기업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끌어낼 수 있는 작은 정부의 존재 덕분에 혁신이 더 활발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틸 교수는 이를 "스위스의 성공 요인"이라고 규정했다.
[촬영 김지헌]
기관이 판을 깔아주면 구성원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활동하는 모습은 스위스 대학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로잔연방공과대는 학생들의 프로젝트와 아이디어를 시제품 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공간, 장비, 지도, 자금 등을 제공하는 '메이크'(MAKE)라는 플랫폼을 운영한다.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바이오센서, 레이싱카, 로켓, 탐사로봇, 태양광보트 등을 만드는 팀을 각자 구성하고 머릿속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구현해낸다.
이곳에서 탐사로봇을 만드는 '엑스플로어' 팀의 학생 조반니 라니에리는 "최선을 다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실패해도 된다. 그 실패를 바탕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다음에 더 잘 할 수 있다"는 말로 학교 분위기를 대변했다.
우주 궤도에 나노 위성 2기를 올리는 것이 목표인 '스페이스크래프트' 팀의 아나 슈바베달은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것도 빚진 것이 없다"며 "여기서 활동하면서 학점도 챙겨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기업들이 우리 활동을 알아줄 것"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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