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들과 그 지랄맞음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2026.04.08 00:10
서른 무렵 갑자기 내 생은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날뛰었다. 돈은 벌었지만 인간관계들은 엉키고 만사가 귀찮아지며 사는 게 버거웠다. 인생이 왜 이토록 지랄맞은가 했다. 지랄이란 불안하고 정신머리가 없고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행동을 뜻한다. 국어사전에 표준어로 등재됐지만 점잖은 사람이 쓸 말은 아니다. 이 비속어를 실제로 입에 올린 적은 없다. 오, 지랄맞은 삶이여, 그러나, 나는 젊지 않은가! 오라, 다시 한번 더!
실패할 때면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실패하고, 실패하렴.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마. 다시 기회가 올 테니까. 실패는 내 자아를 위축시켰지만 그게 내 의지를 아주 꺾어놓지는 못했다. 나는 실패를 도약에의 의지 끝에 달린 도화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이며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다. 나는 실패가 삶의 기본값이라고 믿는다. 실패 없이 평탄하게 산 사람을 나는 존경하지 않는다. 실패를 회피하는 데 성공한 운 좋은 사람에게 존경까지 바칠 수는 없다. 오직 늘 실패에도 지지 않고 늠름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뜨거운 우정의 박수를 보낸다.
실패가 우리 의지를 꺾지 못한다면 실패를 통해 단련돼 더 강해질 수 있다. 내 가장 쓰라린 실패는 실업계 고교를 중퇴한 사건이다. 아카시아꽃 향내가 교정에 진동하는 5월이었다. 교련 교사에게 얻어맞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햇볕이 환한 운동장을 걸어 나오며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학교가 스승의 덕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폭력과 힘으로 학생들을 조련시키는 현장이라면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믿었다. 학교를 그만둔 데는 더 배울 게 없다는 내 오만함도 어느 만큼은 작용했을 테다.푼돈을 내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시립도서관은 내 앞에 열린 유일한 도피처였다. 수중엔 돈 한 푼도 없었지만 시간은 많고 자유는 넘쳤다. 종일 빈둥거려도 누구도 나를 꾸짖지 않았다.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어떤 구속도 받지 않은 채 시와 소설 습작을 하고 문학 이론 책을 섭렵하며 비평문을 끼적였다. 19세 때 신춘문예 공모에 첫 작품을 낸 뒤 내리 낙방했다. 신춘문예 당락이 드러나는 섣달그믐 무렵 늘 쓰라림을 다독이며 방황했다. 20대 중반 비로소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된 뒤 한 출판사 편집부에 들어갔다. 말단 편집부 일원으로 교정을 보고 광고 카피를 쓰다가 퇴사하고 퇴직금을 받아 1인 출판사를 창업했다.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책을 만드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아침 일찍 눈 뜨면 일하러 사무실에 나간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 젊은 나이에 땅값 비싼 서울 강남 한복판에 건물을 올렸다. 일찍이 부자가 됐지만 자산을 관리하고 운용할 만한 능력이 모자랐다. 나는 연소하고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돌아보면 그때 내 운을 다 써버리고, 더 이상 써먹을 운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발이 구두를 다 써서/ 발가락이 구두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김경미, ‘다 쓴다는 것’). 나는 추락의 느낌 속에서 인생이 바닥으로 떨어져 망가지는 걸 엿보았다. 소규모 인생조차 살뜰히 꾸리지 못한 채 실패한 내 모습이 그토록 초라할 수 없었다. 내 사는 꼴을 돌아보니 슬랩스틱 코미디 같고, 광대 노릇이나 하며 조롱받는 듯 부끄러웠다.서른 무렵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를 읽었다. 어떤 문장들이 나를 흔들었는데, 아마 이런 문장이었으리라. “그는 곧 30세가 된다. 서른 번째 생일이 올 것이다. 하지만 종을 울려 그날을 고지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아, 이처럼 능란하게 유희를 할 줄 아는 자는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그대들 괴물이여! 그대들은 유희라는 유희는 모조리 끄집어내었다. 숫자 놀이. 단어 놀이. 꿈 놀이, 그리고 사랑의 유희를.”(바흐만, <삼십 세>) 얼떨결에 서른을 맞았지만 누구도 내게 그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 삶이란 복잡계 속에서의 불가사의한 사건인데, 나는 그 속에 방치돼 있었던 거다. 나는 미처 그걸 꿰어보지 못하고, 겸손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저 천둥벌거숭이로 생이라는 숫자 놀이, 말 놀이, 꿈 놀이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실패에 낙담하고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 후배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런 조언을 할 테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삶을 부수고 망가뜨리는 실패들이라고! 젊은 시절 고비마다 맞닥뜨린 실패의 절망과 쓰디씀, 고통과 자학이 없었다면 삶은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감미로웠을까? 실패를 회피했다고 교양의 밀도가 더 촘촘해졌다거나 더 넉넉하게 내면의 고요를 가졌을 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실패들이 빚은 지랄맞음이 내 마음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고, 세상사를 얕잡아보는 허황된 교만에서 구했을지도 모른다. 용케도 건물주로 살 행운을 잡았지만 손에 쥐지 못한 게 조금도 아깝지 않다. 그 행운은 애초 내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서울 외곽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아내와 함께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며 조촐하게 사는데, 날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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